인공지능에게 명령했다. "런던 사우스 캔싱턴의 조지안 양식 흰색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를 걷는 아시안 남성. 댄디한 옷차림을 하고 선글라스를 꼈어. 한 손에는 테이크어웨이 커피 잔을 들고 다른 손에는 래브라드 레트리버 종 강아지 줄을 잡았어. 날씨는 화창하고 높은 흰 구름이 있어. 사진을 만들어." 섬네일 이미지처럼 멋진 헤어스타일이면 좋겠다.
신선 식품 말고는 싼 게 없는, 인건비가 비싸서 사람 손을 타면 뭐든 비싸지는 런던에서 이발비라고 예외일 리 없다. 캔싱턴 헤어숍들 검색해보면 남자 머리 깎는 비용이 100파운드 안팎이다. 손님이 뜸할 낮 시간대에는 50파운드 안팎에 커트를 하는 곳도 있기는 한 모양이다. 할인해도 9만 원 꼴.
가격도 가격이지만 이곳 사람들 머리만 다뤄본 헤어드레서들은 동양 사람 머리를 잘 못 만진다고 했다. 컬이 있고 부드러운 이곳 남자들 머리털은 짧게 깎기만 해도 단정하고 적당히 멋스럽다. 하지만 돼지털이나 철사에 가까운 강려크한 생직모인 데다 숱마저 너무 많은 내 머리털을 이 자들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짧게 깎으면 최소 밤송이, 극단적으로는 싸움은 못 하는 흰머리 조폭 아재처럼 보일 판이니까.
그래서 내 선택은? 구글맵에서 아시안 헤어 살롱을 검색한다. 구글은 모든 걸 알고 있으니까. 오! 차이나타운에 미용실이 있다. 중국인들 인건비는 런던에서도 싸군. 샴푸 안 하고 머리만 깎으면 30파운드면 된다. 아무리 그래도 머리는 감고 와야지. 그럼 35파운드. 3만5천 원이라고 생각하자.
14번 버스 한 번만 타면 30분 내에 차이나타운에 닿는다. 마음이 가볍다.
"옆머리는 깔끔하게 잘라줘. 내 윗머리는 투머치야. 숱을 좀 정리해줘. 스타일은 유지하면서 깔끔하게만. 오케이?" 알겠다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내 영어를 알아듣는 것 같지가 않다. 미용사도 분명 영어를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중국어 억양이 강하다. 못 알아 먹겠다. 아 이래서 싼 거구나?
이 자는 손이 빠르다. 서툴면 천천히 하면 좋으련만 불안하네, 생각하는 순간 눈 깜빡 할 사이에 옆 머리를 과감하게 깎아 올린다. 헉 소리도 못 내는 내게 헤어드레서는 싱긋 웃는다. "유 라이크 잇?" 이미 수습 불가. 망했다. 차라리 안 볼란다. 백수여서 다행이다. 나는 만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눈을 질끈 감고 있으니 어느덧 이발이 끝난 모양이다. 중국인 미용사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린다. "헤이. 올 던. 워시 헤어. 고 데어." 뜨기 싫은 눈을 억지로 뜬다. 거울 속에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인민해방군이 앉아 있다.
머리를 감고 울상으로 계산대에 가자 역시 중국인인 카운터 직원이 나를 올려다본다.
"32파운드."
"35가 아니고?"
"ㅇㅇ. 니 표정을 보니까 좀 깎아줘야 할 것 같아서."
"고마워. 이 카드로 할게."
"와 니 카드 디자인 쿨하다."
ㅇㅇ 내 헤어 스타일도 쿨하면 좋을텐데.
차이나타운 거리는 늘 북적인다. 순간 깨닫는다. 검은 머리 남자들 대부분 헤어스타일이 비슷하다. 마주친 중국인 여행자는 내게 길을 묻는다. 중국어로. 난 울상으로 돌아선다. "쏘리 아임 낫 차이니즈!"
형이 미국에서 대학원 다니던 시절, 이발은 형수님이 하셨다. 대단히 잘 깎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대략 준수했다. 친구 P는 미국에서 1년간 연수 하던 시절에 집에서 이발기로 손수 옆머리를 밀었다고 했다. 회사에 다니는 것도 아니니 모양이 좀 안 예뻐도 상관 없기도 하고 생각보다 어렵지도 않더라고. 하긴 그 친구는 늘 투블럭인데 옆머리가 보기 싫게 긴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래, 나도 해보지 뭐. 유튜브를 뒤지니 셀프 이발 영상이 무수히 올라와 있다. 다들 쉽게 한다. 머리핀으로 라인을 잡고 옆머리를 쭉쭉 깎아버리면 그만이다. 가위로 윗머리 앞머리를 다듬으면 되는데 일반 가위는 망칠 위험이 크니 숱가위로 정리하는 편이 낫다고 했다.
곧장 주문. 아마존에 hair clippers를 검색하니 뭐 비싸지도 않네. 전문가용까지는 필요 없으니 30파운드 정도 하는 걸로. 아예 가위와 숱가위까지 갖춰도 총액이 미용실 한 번 가는 비용 수준이다.
한 달 쯤 기다려서 도전! 와 그런데 이게 쉽지가 않다. 분명 그냥 쭉쭉 밀어 올리면 된다고 했는데. 옆머리 깎는 것마저 왜 이리 어려운가. 처음에 4mm로 깎았던가. 어느새 옆머리는 파먹은 자리가 선명하다. 잘 보이지도 않는 뒷머리는 또 어쩐다? 대애충 조심스럽게 민 다음 이번엔 가위를 들어본다. 머리카락을 잡고 아래 중간 끝부분으로 가면서 촵촵촵 세 번 정도 숱을 치면 자연스럽다고 했다. 솩솩솩. 으악.
"못 살아. 아니 왜 그래 진짜? 미용실 가라니까?" "아빠! 그만 좀 해!"
다시 14번 버스를 탔다. 카운터 직원은 놀란다. 다시는 안 올 줄 알았는데 가서 놀란 것인가 아니면 내 머리가 그렇게나 이상한가. 미용실 의자에 앉자 그 헤어 드레서가 씩 웃으며 다가온다. "에브리띵 올라잇? 유 원트 세임 헤어스타일?"
젠장. 다시 인민해방군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가위는 반품을 해버리자. 그런데, 반품을 받지 않겠단다. 그냥 환불할테니 물건은 가지란다. 아니 베조스 형, 나 이제 가위 필요 없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