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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백수 Oct 07. 2024

불의 나라 아이슬란드, 뜨거운 맛을 보다

아이슬란드 자동차 여행 첫날, 굉장히 무리가 되는 일정이긴 했다. 아이슬란드를 작은 섬나라로 인식하기 쉽지만 사실은 남한 면적과 비슷한 광대한 땅이다. 제주도 일주하듯이 한바퀴 돌지 뭐, 했다가는 낭패를 보게 된다.


우리 여행 첫날 하루 이동 거리가 지도상 왕복 거리만 750킬로미터. 중간중간 멈춰서 둘러보고 샛길로 빠져서 구경하고, 주유소를 찾아 헤맨 거리까지 감안하면 800킬로미터가 될 수도 있다. 이른 아침에 나가서 자정이 다 되어 숙소로 돌아왔던가. 그래도 폭포에 흠뻑 젖고 맛있는 피자를 먹었으며 빙하와 빙산을 보며 넋을 잃었다. https://brunch.co.kr/@ea77230899864d4/40

첫날은 물과 얼음이었으니 이틀째의 테마는 불이다. 레이캬비크에서 가까운 골든서클을 돌고 뜨끈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레이캬비크 시내도 좀 둘러보자. 그렇다. 적어도 일주일은 들여야 마땅한 여행을 우리는 단 이틀에 끝내야 한다. 골든서클 투어는 6시간 일정으로 제시되어 있으니 할 만하다. https://guidetoiceland.is/book-holiday-trips/the-golden-circle-afternoon-tour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걸어서 간다?

우리의 첫 행선지는 싱벨리어 국립공원. 숙소를 출발해서 달리다보면 익숙한 도시 풍경은 금방 끝난다. 수도인 레이캬비크에 아이슬란드인 세 명 중 한 명이 모여 산다고 해봐야 전체 인원은 14만 명도 안 된다. 아이슬란드 전체로 보면 1제곱킬로미터 면적에 사람 4명도 안 사는 꼴이다. 대한민국은? 500명이 넘는다. 이러니 우리가 그렇게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고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을 하며 사는 거겠지.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암튼 앞뒤로 차가 별로 안 보이는 한산한 도로를 달리는 느낌은 좋다. 도로 상태도 잘 관리되어 있다. 도로변 땅은 농사조차 지을 수 없는지, 혹은 농사 지을 사람이 없는 건지 대부분 황량하게 방치되어 있다. 식량도 거의 대부분 수입에 의존해야 하니 모든 게 비싸질 수밖에 없다. 여름철에는 낮이 길고 기온이 오르고 비가 잦아서 이끼가 바위를 뒤덮고 짧은 풀이 자란다. "거대 외계인의 녹색 똥 무더기 같아." 아내의 이 말은 평생 못 잊을 것 같다.

외계인의 녹색 똥 무더기? 이미지 flickr

양이나 말, 소를 키우는 목장은 군데군데 있다. 외곽으로 빠져나가면 다리를 넓게 건설하지 않아서 차 한 대만 지날 수 있는 곳들도 있다. 맞은편에서 차가 건너오면 잠시 멈춰서 기다려야 한다. 눈치 게임을 해야 하나 싶지만 걱정 안 해도 된다. 마주 오는 차는 거의 없다.


40킬로미터를 달려 도착한 싱벨리어국립공원 탐방 안내센터 주차장이 넓다.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곳이라 대형 버스 주차장도 마련되어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탐방로로 걸어들어가면 5분 이내에 주요 포스트에 도착한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교육 목적이 강한 공간이다. 유라시아판과 북미판이 만나는 곳. 맨틀 위에 떠 있는 두 지각판은 오늘 이 순간에도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하루 1~2센티미터씩 틈이 벌어진다나. 그 움직임이 격렬한 화산활동과 지진의 원인이 된다.

이 공원의 장점은 이런 지질학적 개념을 명확하게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사진에 흔히 등장하는 협곡은 레이캬비크로 가는 주요 도로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불안정하자 지질학자들이 조사에 나섰고, 현재 알려진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다는 점이 확인되면서 공원이 되었다.


유럽에 있다가 걸어서 아메리카로 옮겨갈 수 있다. 지질학적 개념이긴 하지만. 발 밑에서 이 땅덩이가 움직이고 있다는 거지? 거대한 자연의 신비 앞에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한편으로는 지구가 사과 쪼개듯 쪼개지는 것은 아닐까 공상에 빠지기도 하고. 적어도, 겸허해진다. 천문학의 논리로는 우리는 지구라는 배에 탄 채 우주 공간을 비행 중이기도 하다. 지질학적 시간 개념과 거대한 에너지, 천문학적 시공간의 스케일과 비교하면 인간 하나하나는 얼마나 하찮은가...

이미지 flickr

바쁜 여행자들은 탐방로를 걷고 곧바로 골든서클의 다른 여행지로 움직인다. 하지만 시간이 충분하다면 스노클링이나 다이빙 체험을 할 수 있다. 두 지각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다이빙 포인트는 이곳 뿐이라고 한다. 물도 맑고 아름답다. https://guidetoiceland.is/ko/book-holiday-trips/freedive-silfra-tour 


싱벨리어 공원 협곡 사이에 선 바이킹 전사. 인공지능으로 제작했다.

말을 타는 경험도 좋아 보인다. 1000년 전 바이킹들이 말을 타고 모여들어 법을 만들고 다툼을 해결하는 등 의회 모델을 발전시킨 곳이 바로 여기이기도 하니까. 트레일도 조성되어 있으니 하염없이 걸어도 좋겠다.


지구의 뜨거운 재채기? 간헐천

싱벨리어에서 출발해 이번엔 게이시르로 간다. 50킬로미터가 좀 안 되는 거리, 40분이면 족하다. 따로 주차 요금은 받지 않았다. 전기차 충전 시설도 잘 갖춰졌다. 근처엔 캠핑장, 4성급 호텔도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왕복 2차선 도로를 건너 조금만 올라가면 뜨거운 물이 지면 곳곳에 흐른다.


불의 땅 아이슬란드에 흔하고 흔한 것이 온천과 간헐천이다. 온천이 뜨거운 물이 흘러나와서 차분히 고여 있거나 슬슬 흐르는 곳이라면, 데워진 지하수가 솟구쳐 오르는 게 간헐천이다.

한참 기다리다 보면 뜨거운 물기둥이 굉음과 함께 솟구쳐 오른다. 상상 이상으로 큰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지구는 명백히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지구의 재채기 같다. 침방울 튀듯이 물을 뿜어낸다. 탄성과 박수가 사방에서 터진다.


분명 흥미롭지만, 사실 완전히 새롭지는 않다.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 있다. 일본 노보리베츠 여행도 장모님과 함께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봤던 지옥 계곡도 비슷한 개념 아닌가.

이미지 flickr

짧게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내려온다. 게이시르 센터에서 간단히 허기를 때운다. 커피 두어 잔에 버거를 먹었던가? 맛은 평범했다. 가격은 사악하다. 아이슬란드에서는 가성비를 기대하면 안 된다.


굴포스를 들르려 했지만 가족들의 저항으로, 또 시간 관계상 포기. 하긴 어제 폭포를 즐기긴 했다. 온천 예약해뒀으니 가자. 블루라군!


여행 전에 미리 잡아둔 상품은 기본형. 어른 3명 입욕료가 220파운드였다. 아이는 무료. 수건과 라커룸 이용, 얼굴에 바르는 팩은 무제한 제공된다. 온천 중간에 있는 바에서 음료도 한 잔 마실 수 있다.


예약할 때 시간대를 지정하게 되어 있는데 입장할 때 깐깐하게 따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좀 늦게 도착했지만 문제 없었다.


게이시르에서 블루라군까지 147킬로미터, 두 시간 거리다.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아이슬란드는 넓다. 이동 거리와 소요 시간, 연료량 등을 꼼꼼히 점검하는 편이 안전하다. 블루라군은 레이캬비크를 지나서 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간 지역에 있는 온천이다. 케플라비크 국제공항에 더 가까운 곳이니까 여행 마지막날 시간이 여유 있다면 아이슬란드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러서 피로를 푸는 것도 좋겠다.


우리가 갔던 7월 말에는 진입로 주변에서 화산 활동이 있었는지 도로가 다 망가져 있었다. 차 바닥에 돌이 튀어박히는 느낌을 받으며 주차장에 진입했다.


차를 세우고 온천으로 갈 때도 시커먼 화산암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야 했다. 이거 안전한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미지 flickr

미지근한 낙원, 블루라군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니, 아 이곳이 천국이구나. 한국식 온탕과 비교해 물 온도는 뜨겁지 않다. 나약한 유럽인들 같으니. 기대에 못 미친다. 아이는 편안해 했다. 나는 열수가 흘러드는 구멍을 찾아가서 바로 앞에 자리 잡았다.

블루라군 전경. 사람들이 점점이 떠 있는 모습으로 노천온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미지 flickr

물을 가열하지도, 일부러 뽑아 올리지도 않는다. 저절로 흘러나오는 온천수를 그저 잠시 이용할 뿐이다. 미네랄이 엄청나게 녹아 있어서 물 색깔은 딱 저런 희뿌연 푸른 빛이다. 그 광물질을 긁어다가 사람들 얼굴에 발라준다. 돈을 더 내면 무슨 기능성이 있는 다른 색깔 팩도 할 수 있다. 됐다. 얼굴팩은 그냥 한국 화장품 회사에서 만든 게 최고다.

음료를 한 잔씩 들고 사람들은 신이 난다. 반면 바에서 음료를 내주던 직원의 세상 무료한 표정도 웃겼다. 이미지 flickr

두 시간 넘게 온천욕을 하니까 노곤해진다. 아이와 나는 하얀 팩을 족히 서너 번은 했다. 장모님은 약간 어지럼증이 왔다. 아이가 온천 직원에게 이야기하니까 이온 음료를 하나 무료로 줬다. 저혈당일 수 있다면서. 할머니를 챙기는 아이의 따뜻한 마음이 장하다. 영국에 와서 아이를 가르치는 보람도 있구나. 영어로 도움을 청하다니.


오후 6시가 되니 사이렌이 울린다. 훈련이라고 했다. 언제 격렬한 화산 활동이 있을지 모르니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직원은 1~2주 안에 화산 활동이 있을 거라고 예고되어 있다고 했다. 크고 작은 지진이 점점 더 자주 일어나고 있겠지?


다만, 손님들을 벗은 채로 물 밖으로 나오게 하지는 않았다. 훈련이라기보다는 장비 점검에 가까웠을까? 하긴 직원들끼리는 각자 역할을 확인하고 대피 계획을 숙달했을 수는 있겠다. 이런 걸 봐도 그저그런 노천 목욕탕이 아니라 진짜 온천은 온천인가보다.


사진들을 보다 보니 겨울 밤 블루라군에 다시 가보고 싶어졌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머리 위에 오로라가 나타나면 얼마나 황홀할까. 하긴 꼭 비싼 블루라군일 필요는 없겠다. 아이슬란드 어디에나 온천은 널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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