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친구가 성가시다

사진은 전남 담양 소쇄원. 글 내용과 전혀 무관함.

by 런던 백수

1년 조금 넘게 해외 생활을 하고 돌아온 뒤, 약속이 차고 넘친다. 업무상 필요한 사람들은 점심 시간에 거의 매일 약속을 잡아서 순차적으로 만난다.


회사 선후배 동료들은 오랜만에 얼굴을 보면 대개 딱 두 가지 이야기들을 한다. 거의 이변이 없다.

"와 머리 색깔이 왜 그래? 염색은 안 하기로 한 거야?"(그렇다. 난 백발로 살기로 했다. 대단한 계기나 결심은 없다. 귀찮아서.)

"어? 언제 왔어? 밥 먹자!"


이 자들이 나한테 관심이 이렇게 많았나 싶고. 하여간 감사한 일이다. 점심 혼자 먹는 날은 많지 않다. 이런저런 도움말을 많이 듣고 있다. 생각도 못했던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하고.


저녁은 좀더 길게 깊게 이야기해야 하는 사람들과 잡는다. 처가에 초저녁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편안한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 먹으며 이야기하는 게 물론 낫다.


한 달 넘게 이런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덧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친구가 성가시다.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큰 도움은 안 되는 것 같다. 평생 마실 술을 대략 다 마신 것 아닐까.


천성이 게으르고 까칠해서 사람들한테 크게 관심이나 애정 없는 사람이라 친구가 많지도 않다. 중학교 졸업하면 리셋. 고등학교 졸업하면 또 리셋. 군대 사람들? 거의 떠올리지도 않고...대학 졸업하고 나서는 죽고 못살던 동아리 친구들 학생회 사람들 거의 전부 두절. 두 번 이직하는 과정에서 전 직장 사람들 중 연락 주고 받는 사람들 숫자는 다섯 손가락도 남는 지경이다.


이 좁은 문을 뚫은 멸종위기종에 가까운 친구들인데 오랜만에 만나도 그냥 그런 것이다. 서 있는 자리가 너무나 다른 사람들. 삶의 방향도 그만큼 거리가 멀어진 오래된 인연. 머릿속에 가슴 속에 담은 고민도 색깔이 제각각이다.


아주 일반적인 이야기를 할 때, 계엄령 날 밤에 놀랐던 이야기 따위를 나누는 순간이야 뭐 그럭저럭이다. 하지만 앞선 글에 쓴 것 같은 아이 교육 고민, 이사를 어디로 해야 하는가 같은 진짜 요즘 내 생각은 입에 담기를 저어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고민은 배부른 소리거나 중년이 되고도 철 들 줄 모르는 소리처럼 들릴 것도 같으니까.


오랜 친구를 만나서도 왜 이렇게 자기검열을 하는가. 차라리 업무상 필요한 정보를 나누고 최근의 삶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은 생산적이다. 오랜 친구들과 대화가 종종 겉도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흘러간 시간들을 이야기하고 흰소리나 해대며 맛있는 음식 먹으며 취해가는 시간도 나쁘지는 않다. 인생 별 거 있나 싶기도 하니까.


하지만 아무래도 '참 영양가 없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그냥 성가시다'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 친구들에게서 진짜 이해한다는 느낌을, 그대로 존중한다는 안정감까지는 못 느끼는 것 같다. 그 친구들에게 나도 그런 좋은 친구 진짜 친구라는 느낌을 못 주려나. 내 욕심이 과한 걸까.


철학자 이진민은 마침 '친구 사귀는 게 어려운 너에게'라는 글을 썼다. 스스로를 먼저 돌아볼 것, 그리고 휩쓸리지 말고 나 답게 지낼 것, 이렇게 두 가지를 염두에 두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데. https://brunch.co.kr/@jinmin111/472


까짓 친구 좀 없으면 어때, 생각하다가도 허전하기도 하고. 결국은 내 문제인가, 싶다가도 아이고 의미 없다 싶기도 하다. 시간과 체력을 좀 생산적인 데 써야 하지 않을까 더 늦기 전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