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행한 기억 사이에도 섬처럼 떠 있는 행복이 있어서
어린 시절 나의 집은 매일이 전쟁터였고, 나는 그 지옥 같은 풍경 속에서 자라난 아이였다. 부모님의 날카로운 고함이 방문 틈을 넘어와 어린 나의 잠자리를 서늘하게 할퀴던 밤들. 그 끔찍한 소음 사이에서 나를 구원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낡은 사진첩 속에 박제된 단 한 장의 사진이었다.
가엾은 스크루지. 모두가 산타를 기다리며 꿈결 같은 미소를 지을 때, 홀로 외로움의 무게를 견뎌야 했던 아이. 《크리스마스 캐럴》의 책장을 넘기며 그의 쓸쓸함에 유독 마음이 머문 건, 아마도 내 어린 시절의 파편들이 그와 닮아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의 유년은 다툼의 소음으로 가득했다. 부모님은 매일 서로를 미워하고 의심했으며, 그 날카로운 말들은 비수가 되어 꽂혔다. 끔찍하다면 끔찍했을 그 무시무시한 기억들 사이에도, 기적처럼 일 년 내내 기다려지던 날이 있었다. 바로 크리스마스 이브다.
읍내 시장까지 나가야만 구할 수 있었던 귀한 음식들이 상 위를 채우던 밤. 사탕보다 달콤했던 끈적한 유과와 멋진 케이크를 대신한 투박한 크림빵, 그리고 거실 가득 퍼지던 시큼 달콤한 귤 향기. 평소엔 언니와 동생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제 몫을 챙겨야 했던 나였지만, 그날만큼은 허기진 마음을 마음껏 채울 수 있었다.
가장 믿기지 않는 풍경은 그다음이었다. 늘 서로를 할퀴던 엄마와 아빠가 음악에 맞춰 블루스를 추던 순간. 아빠의 손을 맞잡은 엄마의 얼굴엔 수줍은 소녀 같은 기쁨이 서려 있었다. 그 찰나의 평화, 그 찰나의 사랑. 낡은 사진첩 속에 박제된 그 한 장의 기록은, 내 초라했던 유년 시절을 단번에 보상해 주는 단서가 되었다.
'아, 우리 엄마 아빠도 서로를 사랑한 적이 있었구나. 나의 시작도 축복이었구나.'
그 사소하고도 위대한 기억 한 조각이 나를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주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얼음같이 차가운 어른이 되어버린 스크루지에게 필요했던 건, 인생을 통째로 바꿔줄 거창한 기적이 아니라 '나도 사랑받았던 존재'임을 확인시켜 줄 단 한 줄의 추억이 아니었을까.
이제 나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사진첩 속의 그 한 장'을 준비한다. 어쩌면 평생을 지탱하게 해줄 그 소중한 날을. 한 달 전부터 아이의 위시리스트를 비밀스럽게 수집하고, 산타를 기다리다 지쳐 잠든 아이들의 머리맡에 조용히 발을 들일 것이다. 아이들이 산타를 위해 준비해둔 편지와 간식을 몰래 먹어 치우며 흔적을 지우는 이 번거롭고도 다정한 임무를, 나는 짐짓 비장한 마음으로 완수할 것이다.
내일 새벽, 아이들은 까치집이 된 머리를 하고 안방으로 달려오겠지. “엄마, 아빠! 산타 할아버지가 다녀가셨어요! 내가 딱 원하던 거예요. 너무 좋아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얼굴을 하며. 아이들의 환호성으로 가득 찰 내일의 공기가 벌써부터 달콤하다. 비록 완벽하지 않은 일상일지라도, 훗날 아이들이 삶의 거친 파도를 만났을 때 꺼내 볼 수 있는 따뜻한 섬 하나를 만들어주고 싶다.
사랑받았던 기억은 힘이 세다. 나는 오늘, 내 아이의 평생을 지켜줄 가장 강력한 부적을 심어두려 한다.
그리고, 산타를 잃어버린 모든 어른에게.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