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단어에는 '나중'이 없다

왜 자꾸 아이들의 이름을 섞어서 부를까

by 주현정

사랑이란 단어에는 나중이란 의미를 포함하지 않는다. 사랑은 오직, 지금,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김종원 작가의 글 앞에 오랫동안 머물렀단다. 사랑에 나중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니. 엄마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너희에게 하는 말, ‘나중에’가 말이야. 너희에게 엄마의 사랑이 제대로 닿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단다.

"엄마 블록 같이 해요. 그림 같이 그려요. 안아주세요. 같이 놀아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너희들은 엄마를 찾았는데 엄마는 늘 '나중에'라는 말로 일관했구나. "설거지 끝나고, 청소 끝나고, 엄마 지금 너무 바빠. 나중에 같이 하자." 영혼 없는 대답을 너희들은 다 느끼고 있었는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몇 번의 떼를 더 써보고는 이내 엄마의 바쁨을 받아들이던 너희의 모습. 스스로를 추스르고 소파로 몸을 돌리던 뒷모습.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걸까?'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엄마는 사실 그런 너희의 눈빛조차 볼 정신이 없었나 봐. 집안일이 뭐가 그리 중요해서 그랬을까? ‘나중에‘라는 그 기약 없는 약속들을 엄마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했구나. 미안하다.

"엄마는 누구를 제일 사랑해요?" 자식이 둘 이상 있는 집안의 부모들이 늘 겪는 딜레마일 거야. 누구를 더 좋아한다고 말해야 하나? 린이와 있을 땐 린이가 제일 좋고, 선이와 있을 땐 선이가 제일 좋다고 말했던 때가 있었던 것 같아. 그땐 아마 엄마가 눈앞에 있는 너에게 집중하고 싶었고 그 아이를 좀 더 특별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안단다. 엄마의 마음속에 너희들은 둘이 똑같이 사랑스러운데 어떻게 감히 그 경중을 따질 수가 있겠니? 눈앞에 잠깐 너희의 행복한 모습이 좋아서 거짓말을 했던 것 같아.

“린아선아“둘의 이름을 늘 한 번에 부르는 엄마에게 "엄마 난 선이 아니에요. 린이에요. 이름 좀 제대로 불러주세요." 너희의 그 서운한 불평을 기억한단다. 엄마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항상 그렇게 이름이 나가버려. 신경 쓴다고 쓰는데도 이상하게 이름 두 개가 꼭 하나의 이름처럼 엄마 입에서 나와 버려 후회하곤 하지. 눈앞에 있는 아이의 이름이 먼저 나가는 것은 왠지 좀 괜찮게 느껴지는데, 반대의 경우에는 엄마의 마음속에 네가 뒷 순위처럼 느껴질까 봐 미안함이 밀려온단다.


그런데 말이야, 외할머니도 엄마랑 똑같았어. 외할머니는 엄마의 이름을 ‘진아‘라고 제일 많이 불렀단다. 그땐 난 ’정아’인데 왜 나를 언니라고 부르는 거야? 언니만 좋아하는 거 아니야?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

세월이 많이 흘러 엄마도 엄마가 되어 보니까 이제야 외할머니의 모습이 이해되기 시작하더라. 할머니 머릿속엔 아마 네 이모의 생각으로 가득했을지도 몰라. 그건 사실일 거야. 너무 바쁜 외할머니에게 의지할 수 있는 상대가 외할아버지가 아닌 이모였거든.


이모는 대부분의 엄마 몫을 나누어 져야 했단다. 공장에 야간 일을 하러 가야 하는 할머니는 이모에게 어린 두 동생을 부탁하고 가야 하셨거든. "진아, 애들 밥 차려주고, 설거지해놓고, 씻기고, 재우고..." 이모는 이런 모든 일들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다 해내야 했단다.


엄마가 되어보니 이상하리만치 첫째는 든든한 내 버팀목 같은 생각이 들어.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나를 다 이해해줄 것 같고, 내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들을 것 같고,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래서 린이가 좀 부담스러운 점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단다. 동생을 당연히 챙겨야 하고, 엄마 아빠가 없을 땐 그 자리를 대신 채워야 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


네 이모는 지금도 '첫째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을 힘들어한단다. 그때의 그 무거운 의무들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진대. 그래서 우영이 오빠에게 한 번도 '우리 첫째'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더구나. 외할머니의 마음엔 아마 이모로 가득 차 있었을 게 분명해. 외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좀 외롭게 만들었었거든.

주저리주저리 이런 말까지 흘러와 버렸네. 네 이름을 두 개로 늘 부르는 엄마를 좀 해명하고 싶어서 시작한 말이었는데. 아마 지금 엄마의 마음에 너희 둘로 가득 차 있어서 이름이 둘 다 한꺼번에 입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줄 수 있겠니? '아, 엄마 마음에 지금 우리 둘이 다 들어 있구나' 하고 말이야. 이름을 섞어 부르는 것은 엄마의 마음에 저장 공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희 둘을 한 번에 품으려는 모성의 서툰 과정일지도 몰라.

세상에 태어나서 엄마가 가장 잘한 일은 린이, 선이 엄마가 된 일인데, 자꾸만 ‘나중에‘를 외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입으로만 외쳐대는 사랑이란 녀석이 너희 마음에 닿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구나 싶어 무섭기도 하고 말이야. ‘나중에‘라는 습관을 좀 고쳐보려 해. 사랑이란 단어에 아예 포함도 되어 있지 않다는 ’나중에’란 말을 말이야.

내 딸 린아, 선아. 진심으로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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