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웨스트 치마와 푸세식 화장실

결혼 10년 차, 내가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이유

by 주현정

전북 임실, 작은 초가집에서 나는 지금의 시부모님을 처음 만났다. 내 나이 서른다섯, 하이웨스트 치마에 뾰족구두, 명품 가방을 들고 있었다. 한 손에는 선물 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명품 가방을 든 채 처음 인사를 드린 곳. 조금은 어색하고 불협화음 같았던 우리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키가 작고 통통한 체격의 어머니, 오랜 목수 생활로 단단한 근육질의 아버지. 인상이 참 따뜻한 두 분은 함박웃음으로 나를 반겨주셨다. 어머니의 포근한 포옹 덕분이었는지 그 작은 집은 전혀 초라하지 않았다.

사실 두 분은 인천에 거주하신다. 그날은 벌초 때문에 아무도 살지 않던 옛집에 잠시 머무르신 날이었다. 며느리 될 사람이 온다 하니, 무성했던 풀은 아버님이 베고 집안은 어머님이 구석구석 정리하셨다고 했다. 음식은 미처 준비하지 못하셨다며 함께 만들어 보자 하셨고, 나는 그 차림 그대로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쳤다.

무슨 용기였을까. 예비 시아버지께도 함께 하자고 말씀드렸고, 흔쾌히 응해주신 덕분에 우리는 나란히 전을 부쳤다. 어머니가 잘라주신 호박에 아버님이 밀가루를 입히면 나는 계란 물을 묻혀 남자친구와 구웠다. 화려한 착장의 예비 며느리와 시부모님, 그리고 남자친구가 함께 명절 음식을 준비한 풍경은, 어른들 눈에 꽤 귀엽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먹은 저녁 식사는 유난히 맛있었고, 고봉밥을 드시던 아버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설거지를 함께 하고, 잠자리를 준비하며 얼음장 같은 물로 세수를 했다. 덕분에 민낯이 첫날부터 공개되었지만, 더 큰 문제는 푸세식 화장실이었다. 어릴 적 경험은 있었지만, 하이웨스트 치마와 뾰족구두로는 도무지 용변을 볼 수 없어 보였다. 하필이면 그런 날, 배에서 급한 신호까지 왔다. 나는 남자친구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고, 우리는 산책을 핑계로 읍내까지 나갔다. 공중화장실을 찾을 수 있었고, 그 순간은 지금도 손에 꼽을 만큼 절실했던 순간이었다.

이혼한 부모 밑에서 자란 나에게, 그렇게 따뜻한 명절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함께 그 초가집에서 하룻밤을 보냈고, 그날은 내가 기억하는 명절 중 가장 따뜻한 날로 남아 있다.

"아이고, 예뻐라~"를 연신 외치시던 시어머니는 떠나는 날, 도저히 참지 못하고 물으셨다. "그래서 우리 종혁이랑 키가 같냐? 너희는 키가 크니까 미국 가서 살아야겠다."며 웃으셨다. 참고로 남편은 키 185cm, 나는 그보단 작다. 그렇게 우리의 첫 만남은 유쾌하게 마무리되었다.

시부모님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시다. 결혼하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사실 며느리 조건은 단 하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었단다. 나는 종교가 없었기에 조건에는 맞지 않았지만, 어머님은 그런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셨다.

명절에 시댁에 가면 나는 음식을 준비하지 않는다. 아직 정정하신 증조할머니와 어머님이 미리 장만해 둔 음식을 나는 그저 맛있게 먹기만 한다. 결혼 후 곧 임신한 나를 배려하신 것이리라. 다음 해엔 아이 돌보느라 힘들 텐데도 올라와 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하셨다. 키가 큰 내 허리가 아플까 봐 설거지도 시키지 않으신다. 제사도 없다. 우리는 손을 잡고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

어머님은 언제나 전화를 반갑게 받으신다. "아이고, 우리 며느리냐!" 그 목소리는 나를 미소 짓게 한다. 내가 무슨 복에 이런 분을 시어머니로 만났을까. 어머님은 나의 편지에 눈물을 훔치시고, 작은 날들을 소중히 기억하며 챙겨주시는 분이시다. 전철을 타고 도시락을 싸 한강으로 소풍을 가며 행복해하시고, 아이들이 잘 크는 건 다 며느리 덕분이라고 말해주신다.

그런 어머님은 남편의 생모가 아니다. 남편이 아기였을 때 생모에게 버려졌고, 고아원으로 보내질 뻔한 아이를 어머님이 거두셨다. 나는 항상 말한다. 낳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키우는 게 전부라고. 열 달을 품지 않았어도, 평생을 품어주신 우리 어머니. 남편이 지금처럼 따뜻한 사람으로 자란 건 다 어머님 덕분이다.

결혼한 친구들은 명절마다 시어머니 이야기를 꺼낸다. 설거지, 음식, 손님, 고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나에겐 명절증후군이란 없다. 감사하고 따뜻한 기억만 있다.

결혼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힘든 순간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어머니의 목소리다. 나를 진심으로 반겨주는 그 목소리는 언제나 나를 편안하게 한다. 나는 가끔 남편에게 농담처럼 말한다. "만약 당신이랑 이혼하면 가장 아쉬운 건 어머니를 못 보는 거야."

결국, 가족은 피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쌓아온 시간과 진심 어린 배려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내 두 번째 부모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리고 그런 가족을 얻게 된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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