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언니

언니의 품은 따뜻했다.

by 주현정

부모의 부재 속에서 우리를 품어준 큰언니.

그녀는 나에게 언니이자, 엄마였다.

지금도 내 삶 가장 가까운 곳에서 여전히 든든한 ‘친정엄마’로 존재해주는 그녀.


엄마와 아빠는 우리가 어릴 때 이혼하셨다.

하루도 빠짐없이 들려오던 싸움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하다.

매일 밤, 나는 이불 속에서 귀를 막고, 빨리 끝나기만을 빌었다.

아무리 꼭 막아도 새어 들어오던 엄마의 울음소리.

엄마를 지켜주지 못하는 무력감은 어린 나를 깊은 슬픔 속으로 끌고 갔다.

우리 삼 남매는 그렇게 각자의 이불 속에서 그 시간을 견뎠다.


두 분은 서로를 지독히도 미워하며 10년 넘게 함께 살았다.

그 끝에서 찾아온 이혼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겐 한 줄기 빛이었다.

매일 싸우는 부모 대신, 큰언니의 품에서 따뜻함을 배울 수 있었다.

언니는 기꺼이 어린 두 동생을 품었다.

자신의 학업까지 포기하며 우리를 자식처럼 키웠다.

낮에는 치과 간호사로, 밤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세수를 하다 코피를 쏟던 언니의 얼굴이 아직도 선하다.


쌀이 떨어진 날엔 라면으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우리에게 방과 후 아르바이트는 일상이었다.

남동생은 오락실에서 동전 교환 일을,

나는 나이를 속이고 갈빗집에서 일했다.

고기를 먹는 손님들이 그렇게 부러웠다.

그들이 남기고 간 숯불 위에 다 식은 갈비 몇 조각을 몰래 입에 넣었다.

그 달콤하고 고소한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신문 배달부터 호프집 서빙까지,

우리는 안 해본 일이 없을 만큼 일했다.


돌아서면 배고팠던 시절,

우리는 각자의 월급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날은 우리만의 소소한 회식 날이었다.

통닭을 시켜 먹고, 고기를 구워 먹는 그 날이 얼마나 기다려졌는지 모른다.

그 시절 남동생의 작은 소원은 통닭 한 마리를 혼자 다 먹는 것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던 허기,

그 허기는 아마도 부모의 부재 때문이었으리라.


언니는 결혼 전날까지도 우리와 함께 살았다.

부모의 지원이 없었기에 우리는 외풍이 심한 원룸에 살았다.

겨울이면 신문지를 창에 붙여야 했고,

창을 열면 불과 1미터 앞에 바로 다른 건물의 벽이 있었다.

곰팡이, 담배 냄새, 고성방가, 새벽의 토사물.

그 지저분한 환경 속에서도

언니는 우리의 든든한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다.

그곳은 춥고 어두웠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웃었고, 때로는 행복했다.


항상 배고팠던 우리의 집으로

늘 맛있는 음식을 두손 가득 들고 오던 사람이 있었다.

지금의 형부다.

우리는 그를 웃으며 ‘고아원 원장’이라 불렀다.

형부가 오는 날이면 치킨이 남기도 했다.

신문지를 깔고 둘러앉아 먹던 그날만큼은

세상이 부럽지 않았다.

그 형부는 결국 언니와 결혼을 했다.


혼수는 사치였다.

언니는 말 그대로 ‘몸만’ 시집을 갔다.

그런 언니에게 내가 해줄 수 있었던 건,

결혼 소식을 듣자마자 아껴 모은 내 월급 전부였다.

당시, 카드도 없이 살던 내가 정말 안 먹고 안 입으며 모은 돈.

500만 원 남짓이었던 그 돈을, 언니에게 주었다.

편지와 함께.

“언젠가 꼭 필요할 때 쓰라”고.

그날, 우리는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참 많이도, 끝없이 눈물이 났다.


내가 결혼하던 날,

없는 살림에도 제일 좋은 혼수를 해주고 싶어 하던 언니.

내가 아이를 낳던 날,

버선발로 달려와 나보다 더 아파해 주던 언니.

이사하던 날,

“밥솥이 먼저 들어가야 한다”며 아침부터 찾아와 벨을 눌렀던 언니.


지금도 제일 가까운 곳에 살며

내게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주저 없이 달려와 주는 사람.

내게 언니는,

친정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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