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넘어지는 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코끼리 먹는 법
아이스링크장. 처음엔 낯설고 두려운 단어였다. 하지만 벽을 짚고 한 걸음씩 내디뎠던 그 순간, 나와 우리 가족은 무대 중앙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처음이란 누구에게나 어설프고 엉거주춤하지만, 그 길 위에만 있다면, 멈추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푹푹 찌는 여름. 수영장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곳도 없는 계절이다. 주말이면 우리의 대화는 늘 똑같다. “뭐 할까?” 그날도 그랬다. “아이스링크장?” 남편이 툭 던졌다. 너무 낯선 단어였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운동신경이라고는 없는 내가, 과연 그런 곳에 갈 수 있을까?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 시대엔 ‘롤러’였다. 바퀴 네 개가 달린, 그나마 안전한 신발. 그마저도 넘어지기 일쑤였다. 요즘 아이들은 바퀴가 일렬로 선 인라인을 탄다. 어떻게 중심을 잡고 타는 건지 도통 감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두렵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그 경험까지 빼앗을 순 없었다.
우리는 늘 1:1 케어를 원칙으로 한다. 큰애는 남편이, 둘째는 내가.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여보, 할 수 있겠어? 난 내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들 거야. 1:3 케어, 가능할까?” “해보자. 어떻게든 되겠지.” 남편의 말에 우리는 얼떨결에 빙상장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첫 경험이 주는 설렘에 들떠 있었고, 우리 가족은 스키복에 가까운 복장으로 완전 무장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반팔·반바지 차림이 대부분이었다. 민망했지만, 남의 시선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나는 여섯 살, 아홉 살 딸을 돌봐야 하는 엄마니까. 속으로 수십 번 되뇌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누군가 봤다면, 어디 대회라도 나갈 기세였다.
다행히 120cm 이하 아이들에겐 펭귄 모양의 보조 장비가 대여되었다. 둘째는 그 장비 덕분에 금세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제는 나였다. 나는 빙판 위에서 서 있기조차 버거운 상태. 큰딸은 벽에 딱 붙어 있었고, 나도 그 옆에서 겨우 균형을 잡으며 걷기 시작했다. 남편은 둘째를 돌봤고, 나는 큰딸과 함께 벽을 짚고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빙상장은 시원했다. 오랜만에 두꺼운 옷을 입고 노는 것도 신선한 경험이었다. 중앙에선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연습 중이었다. 어린아이였지만, 어찌나 아름답던지. 검은 드레스를 입고 백조처럼 우아하게 돌고 있었다. 나도, 큰딸도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선수도 처음이 있었을 거야. 지금 너처럼. 너도 계속 연습하면 백조처럼 탈 수 있어.”
모든 일엔 처음이 있다. 나는 초보 작가이고, 큰딸은 초보 학생. 남편은 초보 주식 투자자, 둘째는 모든 것이 처음인 나이다. 나의 꿈은 베스트셀러 작가, 딸아인 학생회장, 남편은 파이어족을 꿈꾼다. 그 목표에 닿기 위해 우리는 우리만의 무대에서 묵묵히 연습 중이다.
첫 바퀴를 도는 데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헬멧을 벗기니 딸아이의 머리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을까. 린아, 많이 넘어져야 빨리 잘 타게 되는 거야. 잘 넘어지는 법을 배우는 거야. 넘어지지 않으려는 딸에게 이렇게 말하고 나를 돌아봤다. 많이 넘어져야 빨리 잘하게 되는 거야. 이 말이 메아리처럼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렇게 두 바퀴, 세 바퀴를 돌았다. 걸리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마지막 바퀴를 돌 땐 1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남편이 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한 바퀴 도는 데 몇 분밖에 안 걸린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전까진, 그 15분이 최고 속도인 줄 알았다.
딸도, 나도 벽에서 손을 떼고 빙판 위를 걸었다. “린아, 이제 손 안 짚고도 걸을 수 있어. 너무 멋지다, 우리.” 내 입에서 감탄사가 계속 쏟아졌다. 몇 시간만 더 타면, 정말 무대 중앙까지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치고, 포기하고 싶은 날도 있지만, 그 길 위에서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도착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코끼리를 먹는 법을 아는가? 한 입부터다. 나는 글을 쓴 지 겨우 6개월 차. 그런데도 조급해하는 내가 보인다. “이렇게 열심히 쓰는데, 왜 아직도 조용하지?” 지금은 훈련의 시간이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처럼 깊은 뿌리를 내리는 시간. 오늘도 조급한 마음을 눌러 앉히고, 내가 해야 할 몫의 삶을 살아낸다. 그렇게, 한 걸음씩 나는 내 꿈에 다가간다.
무대 중앙에서 연습하던 그 피겨 소녀는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세계 챔피언? 제2의 김연아? 그 끝이 무엇이든, 그 무대에서 끝까지 해내길 바란다. 언젠가 TV 속에서 오늘 봤던 그 소녀가 웃으며 메달을 목에 거는 날이 오기를. 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날도, 딸이 학생회장이 되는 날도, 남편이 파이어족이 되는 날도. 그 모든 날을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묵묵히 살아내며 기다린다. 오늘도 꿈이라는 코끼리 한 입을 먹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