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비난이 아닌 이해로 시작된다
“린아, 수학하자. 가방 정리하고, 알림장 꺼내줘. 엄마한테 보여줄 서류는 없어? 물은 마셨어? 날이 더운데 물 안 마시면 큰일 나. 양말은 세탁실에 넣고, 손 씻었어? 수학 문제 언제 풀 거야? 엄마가 지금 몇 번째 말하고 있는지 알아? 대체 언제 할 거냐고!”
딸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내 입은 모터라도 단 듯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동시에 집안일에 돌입했다. 눈앞에 펼쳐진 집안일. 날은 푹푹 찌고, 내 신경은 잔뜩 곤두서 있었다.
어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수십 번의 잔소리 끝에 결국 화가 터졌다. 수학 문제집을 책상에 내리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언제 할 거야! 엄마가 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하냐고!”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에, 딸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엄마, 왜 이러지? 이제 하려고 했는데…’
딱 그런 표정이었다. 짜증이 섞인,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말없이 문제집을 펼치고 펜을 들었지만… 무서웠다.
딸이 나에게 화가 난 건 아닐까?
우리 사이가 멀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바라던 건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비난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딸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일들’만 보였고, 그것들이 빨리 처리되길 바랐다.
딸 앞에 책을 펴고 앉았지만, 글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공기가 너무 무거웠다. 그 무게 속에서 나는 ‘어른’이라는 이름표를 짊어지고 있었다. 적어도 내 딸 앞에서는 어른스러운 결론을 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때, 펜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수학 문제 풀이가 끝난 것이다.
“린아, 엄마랑 이야기 좀 할까?”
딸은 내키지 않는 눈빛이었다.
“좀 이따 하면 안 돼요?”
하지만 나는 간절했다.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엄마는 너한테 자꾸 잔소리를 하게 되고, 너는 그게 힘든 것 같아. 우리,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엄마는 너랑 사이가 안 좋아지면 정말 못 살 것 같아. 친구 같은 사이가 깨질까 봐 너무 걱정돼.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아…”
“엄마 울어요?”
정말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딸이 내게 등을 돌리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엄마는 린이랑 잘 지내고 싶어. 진짜로. 우리,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같이 얘기해 보자.”
그제야 딸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엄마의 진심을 알아주는, 고마운 그 눈빛.
“그럼… 엄마가 잔소리하기 전에 내가 먼저 다 해볼게요. 해보고도 안 되면, 그땐 잔소리해도 들을게요.”
“그런데 엄마랑 너의 시계가 다른 것 같아. 엄마 시계는 지금 당장 해야 할 일 같은데, 넌 좀 있다 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 우리 서로의 시계가 다른 건 아닐까?.”
“아…”
“그래서 말인데, 학교 다녀오면 타이머를 30분 맞춰보는 건 어때? 그 시간 동안은 마음껏 놀고, 쉬고, 간식도 먹고. 그리고 30분이 지나면 해야 할 일들을 착착 해내는 거지. 어때?”
“좋아요. 그렇게 해요.”
그렇게, 우리는 극적으로 조약을 맺었다.
딸이 느끼는 시간과 내가 느끼는 시간 사이의 간극. 그 차이가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것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딸은 내가 말을 쏟아낼 때마다 책 속에 빠져 있었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내 기준과 일정에만 갇혀 눈앞의 일들만을 다그쳤다. 닿지 않을 소리인지 알면서도 내입에서는 자꾸 잔소리가 쏟아져 나다.
내 시계가 정답이 아니라는 것.
딸에게도 분명 그녀만의 시계가 있다는 것.
그때서야 깨달았다.
우리는 수직 관계가 아니라 수평 관계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딸을 ‘나와 동등한 존재’로 인정해야 했다. 그녀는 하나의 인격체이며, 존중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다. 비난으로는 사람을 바꿀 수 없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일 것이다. 나 역시 누군가가 나를 비난하면, 먼저 방어부터 하게 되지 않았던가.
사랑은, 오로지 ‘이해’로만 이루어진다.
이번 사건을 통해 나는 그것을 다시 한번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