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놀이터에서 배운 부모의 본능
놀이터에서 아이와 함께 뛰노는 평범한 하루.
하지만 그날, 작은 사건 하나가 우리 가족의 하루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리고 나는 부모라는 이름이 주는 ‘본능’을 다시 배웠다.
부모 9년 차.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서툴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아이들에게 안전한 둥지를 만들고자 애써왔다. 마치 아빠 펭귄이 몇 달을 먹지도 않고 알을 품고, 엄마 펭귄이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해 먹이를 구하듯. 헌신과 협력, 그것이 부모로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큰아이가 다섯 살이던 어느 봄날, 우리는 토끼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해 근교의 토끼 농장을 찾았다.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은 매점에서 간식을 하나씩 집어 들고 토끼가 있는 언덕 위로 달려갔다. 토끼에게 먹이를 주고 조심스레 쓰다듬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오길 잘했네.’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지는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농장 아래 마련된 놀이터로 자리를 옮겼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나는 이제 막 걷기 시작한 둘째를 붙잡느라 정신이 없었고, 큰아이는 남편과 함께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때, 갑자기 한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근처에 있던 아이 엄마가 소리치며 호들갑스럽게 달려왔다.
“악! 괜찮아?”
순간 공기가 얼어 붙었다.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아이 뒤에는 우리 큰딸이 서 있었다. 나는 상황을 보지 못해 아이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저기 동생이 혼자 앞으로 넘어졌어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울음소리에 놀란 눈치였다.
“괜찮아, 다른 데 가서 놀자.”
나는 그렇게 상황을 넘기려 했다.
그런데 그 아이 엄마가 우리 딸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남편과 나는 동시에 그 시선을 느꼈다.
“왜 그러시죠? 저희 딸이 민 게 아니에요. 혼자 넘어졌는데요.”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동생이 앞에서 넘어졌으면 괜찮냐고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교육을 어떻게 시키신 거예요?”
순간 멍해졌다. 그 말은 사실을 왜곡한 채, 우리 아이의 인성을 의심하는 것이었다. 남편과 나는 동시에 말했다. 남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의 분노가 느껴졌다.
“고작 다섯 살 아이가 꼭 그렇게 말해야 하나요? 아줌마. 그래서 우리 딸을 흘겨보신 거예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막말을 퍼부었다.
“아줌마? 뭐? 너는 거울이나 보고 다녀! 얼굴이 개그맨이야 뭐야!”
기가 막혀 말문이 닫혔다. 황당함과 기가 막힘이 뒤섞여,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이 오히려 그녀를 더 자극했다.
“웃어? 지금 웃겨? 너 뭐 대단해?”
그때 그녀의 남편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만하고 가자.”
지친 얼굴이었다. 아마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우리가 놀이터를 빠져나갈 때까지 따라오며 “개그맨” 운운했다. 남편은 상대를 하면 같은 사람 되는 거라며 나를 끌었다.
그날, 딸들은 울었고 우리는 분노와 당혹감 속에서 허탈함을 느꼈다. 아이들 앞에서 다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본능처럼 나섰다. 이유 없이 우리 딸을 흘겨보고 상처 주려 한 그 엄마를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날 나는 남편의 든든함을 다시 느꼈다. 평소 온순한 사람이 그렇게 분노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그의 분노 덕에 오히려 내가 절제할 수 있었다. ‘이러면 안 돼, 아이들이 울고 있잖아.’ 나보다 먼저 화를 내주고 내 편에 서 준 사람, 그 존재의 힘을 실감했다.
차로 돌아오는 길, 남편은 내 손을 꼭 잡았다.
“그 남편도 참 안 됐다. 매일 저런 사람과 사는 것도 고역일 텐데.”
자신도 진정이 안 된 얼굴이었지만 나와 아이들을 먼저 다독였다.
“엄마, 아빠가 다투는 모습 보여서 미안해. 그런데 린이를 누가 괴롭히는 것 같아서, 그냥 넘길 수 없었어. 우리 딸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그래서 싸운 거야. 이번만 이해해 줄래?”
“네.”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이 있은 후로, 한동안 놀이터에 가기 꺼려졌다. 딸아이 근처에 다가오는 사람이 괜히 수상해 보였다.
가끔 그날을 떠올리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엄마, 아빠는 우리 딸 누가 괴롭히면 가만 안 둬. 그래서 키가 이렇게 큰 거야.”
자신에게 든든한 편이 있다는 걸 느끼길 바랐다.
부모가 되어 배운다. 나 자신보다 소중한 존재를 키운다는 건, 얼마나 많은 감정과 책임을 불러오는 일인지. 내 아이가 부당한 상황에 놓이면 가장 먼저 싸울 준비가 되는 사람이 부모라는 걸, 그날 처음 실감했다.
그리고 더 고마운 건, 그 순간 나와 같은 마음으로 서 있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부부가, 부모가 되어가는 중이다. 부모가 된다는 건 단순히 아이를 키우는 일이 아니라, 아이의 세계를 지켜주는 사람으로 서는 일이다. 때론 부당함에 맞서야 하고, 때론 한 발 물러나야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같은 마음으로 나란히 서 줄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다. 그 힘으로 우리는 오늘도 부모가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