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ine Art Zu Leben

삶의 격 / Peter Bieri

by 한대경 Dae Gyeong Han


존엄성은 하나가 아니라 많은 것을 의미한다

이 많은 것들은 한 인간의 삶에서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그것을 이해한다고 자부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자기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간 존재의

광대한 지도를 그리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 있는 오만은 불가피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관대히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1901년 리스본

페드루 바스쿠 데 알메이다 프라두


<중요한 것에 대하여>







철학은 인간의 존재를 조명하는 도구로서, 인간 삶의 형태를 규명하기 위한 가장 큰 첫걸음이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철학의 질문 중 하나는 '과연 인간은 존엄한가'에 대한 고민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삶의 형태를 세 가지 차원으로 분리하는데 첫째, '내가 타인에게 어떤 취급을 받느냐 하는 것', 둘째 '내가 타인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 가에 대한 측면', 셋째, '나 스스로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종합하면, 삶은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며, 타인의 자아는 어떻게 관용할 것 인가에서부터 시작한다.


1. 독립성으로서의 존엄성


인간은 한 개체로서 기능하고 싶은 자율성의 필연을 갖는다. 대부분은 그것을 독립성으로 인식하는데, 이는 성장과정에서 부모로부터 얻는 대부분의 필연, 예컨대 돌봄을 받는 양육부터 스스로 인지하고 사고하는 교육에 이르는 것들에 의해 나의 욕구가 맞물리기 시작한다. 인간 같은 포유류는 어떤 집단을 이루지 않고서 생존할 수 없기에 타인과의 관계가 생존에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타인의 의존적인 주기는 스스로의 독립을 도모할 수 없고, 독립의 부재는 곧 존엄의 실패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 이런 딜레마에 갇힌 인간이라는 존재는 온전하게 독립하고 자주하여 존엄을 지켜낼 수 있는가? 화자는 본인 스스로가 자아를 확립하고, 목표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부단한 노력에 의해 독립적인 존엄을 확보하고 유지할 수 있다고 언급하며, 단조로운 의지를 넘어서 의지를 입체적으로 의지를 만드는 것, 그러한 사고와 경험의 차이가 독립적인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아(ego)란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나 자신을 의미하는데,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정보를 스스로가 인식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주체로서 인식하고 있는 나로 규정할 수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자아를 가진 사람의 형태를 동일시, 합리화, 투사 등과 같은 것들의 인식의 조직화로 서술하기도 한다. 이러한 자아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자아를 확립한다는 것은 타인의 존재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관계를 맺는 태도와 방식, 어떠한 물리적, 정서적 정보의 유입에도 의연하게 나를 잘 지켜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과정에서 때로 자존심이 상할 수 있고, 사회적인 굴욕감에 스스로를 비하할지도 모른다. 다만, 이것은 자아를 확립하는 과정일 뿐 전부는 아니며, 사회적 관계라는 햇빛과 비바람으로 자아는 성장한다.


억겁의 시간을 지나, 자아는 마침내 독립할 채비를 갖춘다. 자아의 독립성은 실재적, 물리적 독립을 의미한다. 사회 질서 안에 나를 편입시키고, 온전한 나 자신을 지켜내고 유지하기 위한 일을 추동해야 한다. 과거부터 기술을 연마하고, 사회적 필요와 기여를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여기서 사회적 필요와 기여는 반드시 공익적인 활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동을 통해 보수를 받고 삶을 영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분리되지 않은 의존적인 삶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장의 지체 또는 결여는 자기 퇴행으로 즉, 자기 소외로 어어질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이유는(이것은 나의 해석이지만) 노동의 시간을 지나서야 비로소 비노동 시간을 이해할 수 있다. 노동의 시간은 비노동 시간의 의미를 부여하도록 만든다. 노동하는 때와 노동하지 않은 때를 구분함으로써, 시간을 구별할 수 있고, 구분된 시간은 노동의 기능과 비 노동의 기능을 서로 달리함으로써, 자아가 다채롭고 풍성하게 성장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결국, 노동은 타인과 구별된 삶을 영위할 수 있고, 구분된 시간을 인식하고 기능하여 올바른 자아가 기립할 수 있도록 만드는 중요한 구심점이 된다.


2. 만남으로서의 존엄성


주체들의 만남은 서로의 존엄을 확인하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지켜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저자는 사람 간의 만남을 통해 벌어지는 요소에 대해 언급한다. 예컨대, 개입하고 거리를 두는 일, 평등, 인정, 속임수, 무시, 욕정의 대상으로서의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다만 이러한 요소는 사람을 만나면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마음속 사투와도 같은 일이다. 상대의 서사와 감정을 교환하고, 때로는 상대를 목적화하여 목적의 대상 내지는 수단으로 전락시키기도 하고, 그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기도 하며, 나의 자아를 지켜낸다. 저자는 만남으로서의 존엄의 의미를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존엄성은 인간관계를 통해 내가 변할 수도 있다는 마음의 준비와 필요하다면, 그 관계를 끝낼 수도 있다는 각오를 의미하기도 한다." 타인에게 허락하고 나 자신에게도 요구하는 열린 미래와 진실하고 깊이 있는 관계에 필수 불가결한 상대에 대한 충실성, 이 두 가지 사이에는 긴장과 충돌이 존재한다. 언제나 상대방의 영혼 편에 서는 충실설은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충실성과 열린 미래, 이 두 가지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서로 간의 만남은 존엄을 확인하는 상태와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필요에 따라 그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는, 그리하여 경제학에서 말하는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공유할 수 있는 관계를 지향한다. 즉, 모든 만남에 대해 존재와의 사투를 벌이는 것이 존엄의 미덕이 아니라, 정처 없이 바다로 흐르는 강물로서 존재를 인정하는 것도 너와 나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다.


3. 사적 은밀함을 존중하는 존엄성


개인의 사적인 경계를 구분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주체들 간의 만남은 기본적으로 영역을 가르지 않는 특성을 갖는데, 다만 사회 속에서는 이러한 전방위적인 침투와 초대가 혼재하기 때문에 그 영역을 구분하기 위해 만남의 목적을 구성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직장 내에서 업무를 위한 미팅이라던가, 법정에 나가 증언을 한다던가 하는 일이다. 또한 가족과 교류하고 시간을 보내는 일, 좋아하는 활동을 위해 동호회에 참여하는 일, 오래된 친구를 만나 정서를 교류하는 일 같은 일도 엄격한 관점에서는 목적을 구성하는 일이다. 저자는 자신의 사적 경계를 지키는 일과, 타인의 경계를 지켜주는 일을 당부한다. 사적인 것에 대해 말을 아낌으로써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것은 침묵의 경도를 무르게 하여 친밀감을 생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사적인 것은 일종의 치부 같은 것을 의미하는데, 타인의 치부를 침묵하지 않는 태도는 존엄을 지키는 행위라 여기지 않는 것이다. 이 대목은 비판의 여지가 발생하는데, 저자는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사생활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뭔가를 보호하려는 것은 맞다. 그 이유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다. 보호하려는 욕구가 곧 비겁함은 아니다. 첫째, 피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데도 대면을 피하려는 것이 비겁합이고, 둘째, 설사 존엄성을 지킴으로써 뭔가를 지킬 수 있다고 해도 존엄성은 보호에 대한 욕구와는 다르다."


저자는 존엄과 보호에 대한 욕구를 분리시킴으로써, 존엄성에 대한 가치를 더 우위에 있는 것으로 역설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실 생활에서 보호에 대한 욕구와 존엄을 지키는 것에 대한 경계가 문장의 글처럼 구분할 수 있는 일인지에 대해 의문이 남아있다. 마치, 헌법 제10조에 규정된 국민의 '행복추구권'이 국민 모두에게 적용되지만, 국민 모두가 적용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선언적인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4. 진정성으로서의 존엄성


진정성은 측정하기 매우 어려운 개념이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일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언제든지 기만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개인의 정직은 곧 진실한 마음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그 한계를 언급한다. 정직은 나와 상대의 경계와 윤곽을 선명하게 나타날 수 있도록 돕지만 반면에, 상대와의 존엄을 지킬 수 없는 처지에 이를 수 있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그렇기에 보다 완곡하고 성숙한 태도를 주문한다. 같은 상황에서도 다르게 말할 수 있는 관점 내지는 상대의 치부를 사실적으로 말하지 않고 은유적으로 혹은 회피하는 방식으로 제안한다. 진정성은 사적인 영역이기에 과도할 필요는 없다. 상대를 위한 나의 자세나 태도에서 추상적인 진정성이 구체화될 수 있고, 이를 통해 은연하게 드러날 수 있다.


5. 자아존중으로서의 존엄성


자아존중은 주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특성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자아는 무한하게 확장하는 형이상학의 세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물리적으로 제한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경향이 있다. 저자는 어떤 지점에 대해 자아를 제한하는 일이 존엄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자아를 넘어서는 일을 무리하게 요구하면 정체성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확장하는 자아와 현실의 균형을 맞추는 일에 집중한다. 갑자기 조금 다른 면이지만, 과거에 방영했던 드라마 각본 중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었다. '검찰의 힘은 기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소할 사건을 기소하지 않는 데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문장의 뜻을 짚어 보자면(물론 극 중에 대사는 조금 다른 맥락으로 전개된다.), 주체의 존엄성을 지키는 일은 자아존중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한계를 설정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정체성의 위태도 있겠지만, 좀 더 넓은 관점에서는 인간의 한계를 규정짓는 일이기도 하고, 그 한계로서 질서를 부여하여 나와 타인의 공생을 가능케 하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6. 도덕적 진실성으로서의 존엄성


도덕적 진실성은 도덕적 관념을 전제한 주체의 선택에 관한 개념이다. 마치 인간은 자신의 존엄을 위해 상대보다는 나를 우선하는 자세나 태도가 기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자는 자립의 도덕성, 도덕적 존엄성을 언급한다. 도덕의 개념은 공동체를 기반하기 때문에, 주체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자기주장 또는 선택의 제한을 받는다. 저자는 이러한 사회적인 맥락을 고려한 선택이 주체의 존엄을 지킨다고 주장한다. 또한 도덕은 죄와 형벌을 필연적으로 내포하는데, 이러한 지점은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이것은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상황이며, 어떤 속 시원한 해답은 내놓지는 못했다. 다만, 인간의 존엄은 자기 중심성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 구성원과 공동체로 지향하며, 상호 연결되고 결합된 형태로 나타나는 점을 역설한다.


7. 사물의 경중을 인식하는 존엄성


고트프리트 켈러의 단편 <마을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농사꾼인 만츠와 마르티가 각각 경작하는 밭 가운데 경계에는 임자 없이 놀고 있는 땅이 있었다. 두 농부는 오랫동안 가운데 땅을 침범하지 않다가 어느 날 만츠는 그곳으로 들어가 쟁기질을 시작한다. 마르티는 만츠보다 한술 더 떠 땅 한가운데 세모꼴 모양으로 땅을 차지한다. 임자 없는 땅은 경매에 붙여지고 만츠가 땅을 사들인다. 만츠가 마르티에게 말한다. "자네가 내 땅 한가운데로 들어와 아래쪽 땅뙈기를 삼각형 모양으로 잘라 차지했다는 걸 알고 있네. 내가 그런 염치없는 짓을 참아줄 수 없다는 걸 자네도 알고 있겠지. 그래서 다시 그 땅을 거둬들일 테니 그렇게 알게 행여 싸울 생각을 말개!" 이에 마르티가 대꾸한다. "나야말로 왜 싸워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네. 자네는 그 땅 생긴 그대로를 산 게 아닌가! 우리가 다 함께 땅을 살펴보지 않았나? 한 시간 전부터 손톱만큼도 달라진 게 없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후 단편의 전개는 만츠와 마르티에 자녀가 서로 사랑에 빠졌으나, 부모의 싸움은 계속되어 결국 이들은 죽음을 택하게 된다.


사물의 경중을 인식한다는 것은 존엄을 위해 어떠한 것이 더 중요한지를 아는 일임인 동시에, 존엄을 만드는 사람과 사물을 분리할 수 있는 태도 그 자체에 있다. 만츠와 마르티는 애초에 본인 소유의 아닌 것을 탐하기 시작하며 존엄을 잃어버린다. 항구적인 존엄의 상실로 인해, 사랑하는 자식들의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위 단편은 마치 자본주의 사회에 놓인 탐욕한 우리 내 삶을 조명하고 있기도 하다.


8.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존엄성


유한함은 인간의 탄생과 소멸을 의미한다. 유한함을 인정하는 태도가 인간의 죽음이 변함없는 사실로 고정되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야 들여야 하는 비자발적 태도는 아닌가 의문이 든다. 사실 죽음은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 요소를 모두 포함한다. 다만 이러한 요소는 죽음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으며, 죽음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다만, 저자는 첫 장에서 준엄하게 질문했던 인간의 존엄을 죽음 앞에서 매우 겸손한 태도로 맞이한다. 죽음의 상대성을 이해하려는 관점, 마지막을 오롯이 자신으로 살기로 자신하는 자세, 타인의 죽음을 수용하고, 고인의 생전의 관습을 추모하는 것으로 존재의 유한함을 수용한다.




모든 생명에 삶은 존재하지만, 모든 생명이 격(格)을 갖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 책에 인간 고유의 삶의 방식의 무수한 고민을 담았고, 품위를 더하여 서술했다. 철학이 갖는 중요한 함의 중 하나는 인간의 삶의 방식을 고찰하고, 탐구하며, 끝내는 살아내는 지경까지 추동하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달리는 열차 속에 지나치는 전선주처럼 속절없이 지나갔다. 만났던 모든 인연을 잡을 수 없었을뿐더러, 그렇게 할 의지도 박약했다.(모든 인연을 잡아 세우는 일은 오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곳에 가면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그때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일은 마치 자화상을 그리는 일과 같았다. 생전에 자화상을 가장 많이 그린 화가 중 하나인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무려 40여 점이 넘는 자화상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자화상을 그린 이유 중 하나는 일종의 자기 고백적 성격을 담고 있는데, 자기 성찰과도 맥락이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나 역시도 사람과 세상의 것을 보며 반추한다. 저자가 말한 삶의 격은 자신의 품위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품위는 자기 존엄에서 비롯되고, 존엄을 지키는 일은 세상 모든 유한한 존재의 품위를 지키는 일이라고 굳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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