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브라

Part 1.

by 혜진

*

“뭐… 어떻게 해야 하나요?


“꼭 수술을 해야 하나요?”


조직검사결과라 함은 보통 ‘양성 종양이네요.’ 혹은 ‘그냥 물혹이에요.’로 마무리되어야 하는 건데, 악성 종양이라는 말을 듣고는 ‘악성 종양은 뭐, 양성 종양과 되게 다른 건 가’ 싶어서 ‘순수한 의도’로 치료방법을 물어보았다.


“결과가 좋지 않은데… 악성종양이에요. 그러니까 유방암인 거죠.”


“보통은 수술이 1차적 치료예요. 물론, 암의 진행 정도에 따라 항암을 먼저 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수술을 해야 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수술의 의미가 가슴 전체 혹은 절반을 도려내야 한다는 것인 걸 몰랐다. 단순히 세포 조직 조금 떼어내는 정도이겠지, 수술법도 많이 발전했을 것이고, 그래서 수술을 한다고 해도 ‘티 안 나게 잘해주겠지?’라는 암에 대해 무지한, 그것도 전이로 많은 환자들이 죽는 유방암에는 더욱 무지한 지식을 자랑했다.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유방암 진단을 할 때마다 겪는 의사에게는 ‘평범한’ 상황에 대한 대응이었을까? 의사는 메모지에 숫자를 매겨가며, 치료의 과정을 간략히 적어주었다.

1. 수술(부분 절제, 전 절제)

2. 항암

3. 방사선

4. 약물치료

보통은 위와 같은 치료과정을 겪게 되며, 나의 경우, 종양의 크기로 보아 부분 절제 수술을 받을 가능성(나중에 수술 내용이 바뀌게 됨)이 크다고 했다. 항암을 하면 머리가 빠지는지, 부분 절제로 가슴 모양이 달라지는지, 방사선 치료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 물었어야 할 순간, 아직도 난 내가 처한 상황을 부정하고 있었다.


동네에서 갈 수 있는 유외과는 몇 군데 없었다. 경기 광주에 사는 나는 그나마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야탑역 근처나 미금역 근처였다. 유방암을 진단받기 6년 전쯤, 한 유외과에서 가슴에 물혹이 있어서 그 물을 빼내는 처치를 받은 적이 있었고, 그 이후, 최근 유방암 진단을 받은 곳에서는 1~2년에 한 번 정기검진을 받아왔었다. 학원강사일을 하면서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2년 만에 찾아가서 초음파를 받던 중에 의사는 계속 가슴 한 편의 영상을 확인해 보더니, 고민하는 듯하다가 말했다. 확신에 찬 말투는 아니었다.

“모양이 좋진 않은데, 악성인지 아닌지는 조직검사를 해봐야 합니다. 양성종양일 확률이 높지만 만일을 위해 검사해 보죠. 아무 일 없을 거예요.”라고 했다. 익숙한 말이었다. 유방 조직검사를 받기 몇 달 전, 평소 갑상선 기능 저하로 약을 먹던 중 받은 갑상선 초음파 검사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었고, 결과는 양성종양이었다. 그리고 유방 초음파를 매번 받을 때도 무수한 양성종양이 있었기에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몸에 양성종양이 많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신은 암에 걸릴 수 있다. 그 종양세포가 언제 어떻게 얼마나 빨리 돌변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2년 만에, 검사를 받겠다고 제 발로 동네 유외과를 찾아가게 된 이유는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가슴에 통증이 있어서였다. 홈트레이닝을 하다가 엎드리는 요가 자세를 할 때면 바닥에 닿는 왼쪽 가슴이 너무 아팠으며, 유즙은 거의 항상 맺혀 있는 편이었다. 만져지는 혹도 있었다. 비비탄 총알과 비슷한 크기(촉감상 실제 크기보다 작게 느껴짐)에 딱딱했다. 하지만 이 증상들이 병원을 찾아가 검사를 받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임에도 불구하고, ‘유즙이 나오는 사람이 원래 있다. 만져서 아픈 건 큰 문제가 아니다’ 등의 말이(실제로 조직검사 결과가 양성일 확률이 높다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의사가 한 말이었다.) 검사시기를 늦추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꼭 얘기하고 싶다.

-가슴에 통증이 있으면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시라.

-유즙이 나오는 것도, 병(고프로락틴혈증, 즉, 뇌하수체에 종양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이다.

-딱딱한 혹은 암일 확률이 높다.

참고로, 필자는 고프로락틴혈증이라는 희귀 질환으로 유즙이 분비되고 생리불순이 오는 증상을 겪어 약을 한 동안 먹다가 임의대로 중단한 후,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약을 끊은 후에 유즙이 분비되는 현상이 당연히 재발되었고, 통증도 동반되었다. 약을 중단한 것이 유방암의 원인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각 과(유방외과, 내분비내과) 전문의도 모른다고 한다. 고프로락틴혈증과 별개로 암이 생겼는지, 아니면 그것이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즙이 나오는 건 치료를 받아야 하는 병임에 틀림없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

수술까지 이제 한 달 정도 남았다. 수술 전, 수술을 하게 될 대형병원에서 다시 한번 조직검사 및 여러 수술전 검사를 해야 한다. 병원 옮길 때마다 검사를 다시 받아야 하는 뭐 그런 것과는 차원이 조금 다른, 가슴을 열기 전, 전절제를 할 것인지, 부분절제를 할 것인지, 어디까지 어떻게 절제를 할 것인지 계획을 세우기 위한 중요한 검사이며, 부분절제를 하려고 했는데, 암세포가 생각보다 더 많이 퍼져 있어, 일단 열어 보고 다시 수술 계획을 잡아야 할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그런 치밀하고 정확성이 요구되는 검사이다. 동네 유외과에서 조직 검사받을 때는 정말 아프지 않은 지 의사가 여러 번 확인할 정도로 아프지 않았었다. 물론, 초음파상에서 보이는 악성 세포 주변으로 마취주사를 놓고 하기 때문에, 안 아픈 것이 크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마취가 풀리면 그때 약간의 통증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번 상황은 달랐다. 수술을 하기로 한 대형병원의 초음파 검사실에 누워 의심이 가는 모든(양성 세포 포함) 세포 주변을 다 마취하고 검사를 진행했지만 매우 아팠다. 이렇게 찔러보고 저렇게 찔러보고… 여기도 찔러보고, 저기도 찔러보고, 문제는 겨드랑이였다. 겨드랑이는 임파선이 지나가는 곳인데, 보통 이쪽으로 전이가 많이 되어서 초음파 검사 및 의심이 가는 세포의 조직검사는 필수이다. 겨드랑이도 마취를 했는지… 설마 했겠지…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각진 불편한 갈색 인조가죽 목 베개에 의지해 양쪽 팔과 가슴을 이리 구기고 저리 구겨가며, 뭔가 의심이 가는 세포를(모양이 좋지 않은 세포) 계속 누르고 찌르고 채취하고 반복했던 것 같다. 결국은 정상 세포를 화나게 해서 그렇게 아팠던 것은 아닐까? 지금에 와서 생각이 든다. 그렇게 초음파실 의사의 겨드랑이 임파선 전이 소견은 내 수술 및 진료 담당 주치의에게도, 수술 전 날 밤, 수술에 관해 설명해 주던 피곤에 절은 레지던트에게도 ‘당신은 임파선 전이 가능성이 높습니다. 림프절 곽청술을 할 수도 있습니다.’라는 소식을 나에게 전하게 하는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수술이 불과 몇 시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그(전이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소식을 들은 남편은 넋이 나가 보였다. 전이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소견은 무슨 근거로 낸 것이었을까? ‘가능성이 있다.’가 ‘가능성이 높다.’로 바뀌는 데는 ‘전달의 오류’가 있었을까? 일말의 가능성도 쉽게 넘기지 못했던 이유는 내 병이 '암'이기 때문이었을까? 이미 수술 전 검사만으로도 내 왼쪽 가슴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온통 바늘 자국과 멍 자국 투성이었고, 지혈을 위해 붕대로 겹겹이 감아 숨쉬기도 어려운 상태. 그 상태로 시골에 계신 부모님까지 올라오시라고 하여 가족사진을 찍던 날, 나는 그때까지도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

수술 며칠 전 의사에게 전화가 왔다.


“수술 어떻게 하실 거죠?”


“…”


“임파선 전이 가능성도 있고, 암세포 두 개의 위치가 좀 떨어져 있어서 부분 절제를 한다고 해도, 크게 절제해야 해서 심미적인 부분은 장담할 수 없으며, 한 번 더 수술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저에게 어떤 수술이 필요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다음 진료 때까지 결정해서 오세요.”


‘수술을 한 번 더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말을 하고도, 의사는 나에게 빠른 결정을 종용했다. 내가 무슨 결정을 얼마나 시원하게 하길 바랐던 것인가? 물론, 어떤 수술이 나에게 맞을지 의사가 결정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의사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을 것 아닌가. 지금 생각해 보니, 의사가, 수술 스케줄이 꽉 찬 대형병원 유방외과 전문의께서, 부분절제술의 장단점, 전절제술의 장단점을 전화통화로 설명하는 것도 뭐, ‘이 위치에 있는 내가?’ 뭐 이런 느낌일 수 있겠다. ‘암세포를 제거한다 ‘는 장점 말고는 사실 설명해 줄 말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모양이 어그러지는 걸 선택할래? 깔끔하게 없애는 걸 선택할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떤 수술법을 선택할지는 나 자신과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해 봐야 하는 부분이었던 것이다. 심미적인 부분이 중요한 사람이라면, 전절제를 하고 성형외과 수술로 복원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요즘 대부분이 이 복원수술을 택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수술 전, 마지막 진료시간이 다가왔다.


“전절제를 하겠습니다.”


“복원하고?”


“아니요, 미복원으로 하겠습니다.”


“괜찮겠어요?”


“네.”


의사도, 나도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의사로서도 부분절제보다는 전절제가 더 확실한 수술법이라 생각했을 것이고, 나 역시 나에게 필요한 수술은 전절제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유방 복원 수술은 생각보다 길고 어려운 수술이다. 복원하는 방법도 다양하게 있지 않으며, 어떤 복원 수술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수술을 두 번, 세 번에 걸쳐 할 수도 있고, 한 번에 수술을 끝낸다고 해도, 유방외과 수술과 성형외과 수술을 같이 하면, 수술시간이 6~7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유방암 진단을 받고 처음엔, 무조건 복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거로 생각했다. 어떻게 가슴 하나로 살아? 이 나이에, 남편도 있는데, 누구는 일부러 가슴 수술도 하는데. 가슴 복원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때마침, 나라에서 유방암 환자들이 하는 복원수술 성형에 대해서는 의료 보험 혜택을 주겠다고 하던 터였다. 그 역시 너무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생각해 보시라. 여성의 상징인 가슴은 두 개 일 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기에게 젖을 먹일 일이 없을지라도 여전히 브래지어의 컵은 두 개니까.


****

사실, 동네 유외과에서 유방암 진단을 받기 얼마 전, 나는 또 다른 중증질환 진단을 받았었다.


‘비파열성 뇌동맥류’


뇌혈관 질환의 일종으로 뇌혈관이 부풀어 있는 상태를 말하며, 이것이 터지는 경우가 뇌출혈, 잘 알려져 있듯 뇌출혈은 사망 위험이 매우 높다. 거기에 신증이라고 해서 신장염으로 20년째 약을 먹으며 단백뇨를 관리 중이었고, 그 밖에, 앞에서도 얘기한 뇌하수체에 종양으로 인한 고프로락틴혈증에, 갑상선 기능저하증, 그리고 뇌동맥류에 이어 유방암, 그것들을 연이어 진단받은 그 몇 달 동안 만성 두드러기까지 올라와서 정말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부분절제술은 아무래도 유두를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진행을 하는데, 난 상피내암과 침윤성암이 동시에 섞여 있는 케이스였고, 암세포들의 위치가 흩어져 있어서 한 번의 절제로는 부분 절제술이 불가능하고, 유두도 살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에겐 유두를 아예 드러내는 부분절제술을 하거나, 아니면, 수술을 해보고 나서 조직 검사 결과를 보고 한 번 더 수술을 하거나(유두를 살리는 수술을 할 경우, 완전히 제거했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전절제술을 하는 선택지가 있었다. 내 선택은 전절제 미복원 수술이었다. 처음엔 복원을 당연히 하고 싶었지만, 보형물을 내 몸에 넣었을 때, 이 보형물이 내 몸에 아주 잘 맞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고, 체질 상 분명히 염증이 나도 심하게 나는 후유증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가지방을 넣어 복원할 수도 있는데, 그 수술을 하기 위해 수술 시간이 추가로 4~6시간이 걸린다는 걸 알았을 땐, 난 그 마저도 포기했다. 총 6~8시간, 혹은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 동안 마취를 하고, 그걸 내 몸이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뇌혈관이 터지면?’, ‘신장이 망가지면?’등의 기저질환으로 인해 생길 응급 상황에 대해 따져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정도 가지고 걱정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의학기술은 발달했고, 내 몸을 믿고 병원을 믿고 긴 수술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지라고 생각한다. 그저 나의 선택이 그러했을 뿐. 난 누구보다 나 자신을, 내 몸을 잘 안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우선, 가슴 한쪽이 없는 삶을 미리 그려봤다. ‘내가 내 가슴을 거울로 보는 일이 얼마나 자주 있는 가? 그리고 얼마나 자주 있을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슴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나는 거울로 내 얼굴도, 내 몸도 잘 확인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슴에 대해 중요하다고, 이것보다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 흔한 눈썹 문신을 비롯해, 보톡스 한 번 맞지 않고 살아왔다. 외모에 투자할 시간과 돈으로 외국어 하나를 더 배우고, 여행을 한 번 더 하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내 가슴이 작다는 것, 그것이 그와 같은 결정을 하는데 큰 이유가 되었다. 그 존재감은 원래도 없었던 것이어서, 되게 불편하진 않을 것이라 믿었다. 수술한 지 3년이 지난 지금, 달려 있던 그 통증 덩어리가 없어서 몸이 가벼운 느낌이다. 가끔은 속옷을 안 입고도 재활용을 버리러 나갔다 온다. 이제는 거울로 내 몸을 봐도 이상하지 않다. 원래 이렇게 태어났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중요한 한 가지를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았다기보다는 그 한 가지가 내 목숨을 담보로 긴 수술을 받아야 하는 것과 맞바꿀 정도인가 싶었다. 가끔 다시 태어나는 상상을 한다. 그 상상 속에서 지금의 남편과 나는 벌거벗고 뒤엉켜 사랑을 나눈다. 내 심장소리를 온전한 내 가슴으로 그에게 들려주는 것. 그것이 내가 후회하는 이제는 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 되었다.


*****

9월 4일, 내 생일. 입원하는 날이다. 이런 이벤트를 바란 건 아니었는데… 입원 수속이 쉽지 않았다. 오후 1시쯤, 짐을 싸서 병원에 도착하였으나, 병원 측에서 아직 병실이 없고 언제 생길지 모르고, 오후 늦게 되어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전화를 줄 테니 기다리라는 말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병원과 집까지의 거리가 30km 정도, 서울의 교통상황까지 고려하면, 가는 데만 50분 이상 소요되었지만, 집에 가서 대기하는 걸 택했다. 서울의 대형병원이라고 해도 환자와 환자 가족이 쉬거나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이 부족하다. 워낙 유명 병원이다 보니, 입원이나 수술 대기 환자나 가족이 아니어도, 외래 환자들로 북적북적한데, 그곳에서 몇 시간을 더 버틸 자신이 없었다. 두 달 반 전, 수술 날짜를 받을 때 당연히 그 날짜에 맞게 병실이 비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내가 병원의 생태계를 너무 몰라서 한 착각이었다. 수술한 환자의 경과가 환자별로 다 다를 거고, 수술하겠다고 줄 서 있는 환자도 넘쳐나고, 응급 수술을 위해 들어오는 환자들도 많을 테니, 빈 병실이 없다는 건, 여기가 체크인/체크아웃이 정해져 있는 호텔이 아니라는 반증이었다. 더욱이 내일 수술이 몇 시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 원무과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고, 내 주치의 수술팀의 레지던트 의사도 수술 일정은 아직 안 나왔다고 했다. 내일 수술을 하긴 하는 건지, 수술 일정이 원래 그렇게 직전에 잡히는 건지, 그런 일들은 외과의사들에게는 익숙한 일인 건지, 익숙하지 않은 환자는 이 모든 이벤트를 경험담에 포함시키기 위해 겪어내야 하는 것인지 답답했지만,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오후 5시쯤, ‘어디에 계시냐?’는 급히 찾는 듯한 전화를 받고, 바로 집에서 출발하여 저녁 늦게 다시 병원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미 일반 원무과 근무 시간이 끝난 뒤 여서, 응급실로 가서 입원 수속을 밟아야 했다. 그렇게 첫날, 나는 결국, 간암병동에 입원하게 되었다. 유방암 병동에 머물러야 하는 게 맞지만, 자리가 없다는 이유였다. 수술 후, 병동을 옮겨주겠다는 이야기와 함께 간암병동 간호사가 기본적인 입원에 관련한 안내 사항을 전달해 주면서, 내 오른쪽 손목에 혈액형이 쓰여 있는 종이 팔찌를 채워 주었다. 나중에 유방암 병동으로 옮긴 후, 수술이 끝나고 한참 후 퇴원할 때쯤 알게 된 사실인데, 나와 같은 유방암 환자의 경우, 수술하는 쪽 손목에 그 팔찌를 차야 한다. 수술 후, 그쪽 팔에 혈압을 재도 안 되고, 채혈도 하면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을 알리는 표식으로 팔찌를 사용해야 했지만, 즉, 나의 경우 왼쪽에 팔찌를 차야 했지만, 간암 병동엔 그러한 매뉴얼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 후, 레지던트 의사가 밤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찾아와 수술 전 알아야 할 것들, 초음파 상으로 볼 때 임파선 전이 가능성이 크다는 것 등을 설명해 주고(곽청술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도 함께), 유방암 연구를 위해 조직을 조금 더 떼어내는 것에 동의하는지 등에 관한 질문을 하고 서명을 받아 갔다.


“그래서 내일 수술은 몇 시인가요?”


수술 전 날, 밤 9시에 한 질문이다.


“아, 내일 이모모 교수님 스케줄이… 제가 교수님과 이야기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일 아침 8시로 수술 일정이 잡혔어요.”


그 레지던트 의사가 다시 찾아와 알려주었다. ‘일정이 잡혔어요.’라는 말이 정말 급하게, 어쩔 수 없이, 내 일정을 맨 앞에 집어넣었다는 듯이 들렸다. 내일 수술 전 전신마취를 위한 혈관 확보를 위해 주사기까지 꽂고 모든 수속이 끝난 듯 보인 밤늦은 시각, 잠들기 전, 마지막 혈압을 재러 온 병동 간호사가 내 수술 팔찌를 확인하고 놀란 듯하더니 작게 말했다.


“오늘 생일이셨네요! 생일 축하해요!”


******

유방암 수술을 몇 주 앞두고서,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찾아가 ‘암밍아웃’을 했다. 기승전결도 없이 무턱대고(기승전결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대화 도중에, 그냥 갑자기, 툭, 말해버렸다. 엄마의 반응은 ‘경악-슬픔-분노-자책’ 순서로 일어났다. 감정에도 스펙트럼이 있음을 몸소 보여주셨고, 일단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왜 너에게 이런 일이 생기느냐’며 울며 슬퍼하다가 도, ‘네가 성격이 예민하고, 음식도 이상한 것만 먹어서 그렇다, 인스턴트만 먹지 않았느냐’고 분노하시다가, 결국 ‘이 모든 게 네가 자랄 때, 엄마인 내가 잘 먹이지 못하고, 신경을 써 주지 못한 탓’이라며 자책하셨다. 예상했지만, 엄마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셨고 나 역시 엄마가 우는 소리를 들으며, 밤을 보내야 했다. 그렇게 친정에서 강렬한 1박 2일을 보낸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진단을 받은 지 한 달이 좀 넘어 내 감정이 무덤덤해지기 시작할 때쯤, ‘엄마’라는 변수가 찾아왔다. 전화가 매일 세 번씩 왔다.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어.”


“동네 이장 아내도 유방암이었는데, 수술받고 잘 지내, 수술하면 괜찮아진데.”


“너 신장도 안 좋은데 어떡하니.”


“혹시 몰라서 아빠 술 끊었어. 수술하다 신장이식이 필요할지도 모르잖아.”


이식까지는 조금 먼 얘기였다. 위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하는 위로의 말들이었다. 엄마가 전해주는 이야기들이 크게 와닿진 않았지만, 그냥 들어드렸다. 엄마 당신의 마음이 괜찮아질 때까지 시간이 필요한 거니까. 엄마아빠의 눈앞에 당장 내가 없으니까.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무엇을 해줘야 할 지도 막막하실 테니까. ‘감정의 소용돌이가 지나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도 나처럼 괜찮아지는 순간이 올 거야.’


해외에서 한국 유명 가수들이 버스킹 공연을 하는 TV프로그램 ‘비긴어게인 3’ 재방송을 보던 날이었다.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 해변,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 차가운 바닷바람이 부는 모래사장을 무대로 노래 ‘미아’가 들려왔다.


‘길을 잃어버린 나, 가도 가도 끝없는’


‘날 부르는 목소리 날 향해 뛰던 너의 모습이 살아오는 듯’


‘돌아가야 하는 나, 쉬운 길은 없어서’


정말 ‘미아’가 된 듯한 그녀의 열창에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방송을 보고 있는데, 엄마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다.


“박정현 노래 듣다가, 가사가…”


“우리 딸 생각이 나서...”


말을 잇지 못하시고, 아이처럼 엉엉 우셨다.


“엄마도 같은 거 보고 있었네?”


“박정현 노래 장난 아니지?”


난 흘린 눈물을 애써 닦아내며, 누가 들어도 울음을 참는 목소리로 엄마를 달래 주었다. 엄마도 그 노래를 듣는 순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미아’

박정현 노래,

윤종신 작사,

황성제 작곡.


아직도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때 감정이 되살아 난다.

아이같이 울던 엄마…

울음을 참지도 못하고…

바보.


*******

“혹시 나를 찾는 건 아닌지 와 봤어요.”


“항암 안 하기를 간절히 기도할게요.”


암 진단을 받은 후, 블로그를 하기 시작했다. 블로그를 시작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유방암에 관한 정보나 다른 환우들의 수술 경험담을 듣기 위해, 그리고 나 또한, 진단 후에 겪은 감정, 유방암 수술 후기, 치료 과정, 각종 검사 후기 등을 블로그에 남겨서 다른 환우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전달해 주기 위해서였다. 유방암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며, 암세포의 종류와 크기, 진단받은 나이, 호르몬 수용체가 양성인지, 음성인지 등에 따라 수술을 포함한 치료 과정이나 순서가 사람마다 다르게 적용된다. 수술을 받기 전까지는 암세포의 크기와 위치, 전이 여부에 따라 수술법을 정하거나, 아니면 수술받기 전에 항암을 먼저 하기도 한다. 그렇게 내 암에 대한 정보도 잘 모른 채, 블로그에 쓰여 있는 다른 환우들의 치료 과정을 무분별하게 읽어보는 것이 진단받고 나서 수술할 때까지의 흔한 일과라 할 수 있다.


그러다 내 일상을 적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건강식을 먹었는지, 엄마와 통화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얼마나 우울했는지… 등등 주로 감정적인 글을 써 내려가던 어느 날부터 댓글을 남겨 주시는 분이 생겼다. 친정 엄마와 비슷한 나이대의 이 분은 40대 초 반에 유방암 수술을 받으셨고, 남다른 치료 과정과 경험을 가지셨지만 지금은 건강하게 지내시는 분이었다. 블로그에 당신의 글을 쓰기보다는 주로 젊은 유방암 환우들의 블로그 글을 읽으시고, 당신의 경험담과 위로, 격려 그리고 기도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들러 흔적을 남기시는 듯했다.


부분 절제술과 전 절제술 사이에서 고민하는 글에는 무려 47개의 댓글이 달려있는데, 물론 댓글로 내용을 주고받아서 절반이 내가 쓴 것이긴 하지만, 그 안에는 20년 전 전절제 수술을 받은 경험자로서, 그 이후 20년을 살아온 여성으로서 겪은 감정과 후회가 담겨 있었고, 내가 나 자신에게 진솔하게 물을 것을, 남편과 진지한 대화를 해 볼 것을 권유해 주셨다. 내가 처한 모든 상황, 여건 등을 하나하나 다 체크해 주시며, 어떤 것이 더 나을지에 대해서 당신의 의견을 전해주시기도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엄마같이 생각하고 의논해요.’, ‘항상 응원하고 있을 게요.’ 등의 위로 멘트도 잊지 않으셨다.


수술 전 날 밤엔 빨리 자라고 재촉하시기도 하고, 수술이 끝난 후엔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궁금하다고 어디 물어볼 곳이 없어 당신이 달아 놓은 댓글 밑에 물어보기도 하시고, 수술을 하고, 검사를 하고, 경과를 보는 내내, 거의 의사와 다를 게 없는 의학적 진단까지도 예측하시고, 수술하고 나서, 항암이 필요한지 여부를 알기 위해 암 조직을 온코타입 DX검사에 보낸 후에는 내가 항암을 받지 않기를 기도해 주셨다.


엄마 생각에 울며 잠들던 순간에도, 어떤 식단으로 관리해야 할지 모를 때도, 주변의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상처를 받아 힘들어할 때도, 수술 후 2년이 지나 자궁 내막증 조직 검사를 할 때도, 그리고 결국 우울증 진단을 받았을 때도 어느 작은 것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으시고 늘 함께 해주셨다. 암진단을 받고 외롭고 힘들고, 뭘 잘 모르던 시절, 나에게 가장 큰 위로와 현실적 조언을 아낌없이 해 주신 단 한 분인, 그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싶다. 절실한 누군가를 위해 절실한 내가 되어 보는 일, 그분을 통해 배웠던 것 같다.


‘감사했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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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날 아침이 밝았다. 내 수술 시각인 8시가 되기 전, 주치의가 찾아왔다.


“아주 깨끗하게 제거될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주 깨끗하게 제거되는 것은 암세포를 포함한 내 왼쪽 가슴이었다.


“네…”


부모님은 벌써 새벽에 도착해 계셨다.


다가온 수술시간, 팔다리는 너무 멀쩡하지만, 절차상 간호사가 나를 휠체어에 태워 수술 대기실까지 바래다주었다. 팔다리도 멀쩡하고, 정신도 멀쩡하고, 어디 아픈 곳도 없이 휠체어에 앉아 수술실 앞에서 가족들과 마주하고 있으니 살짝 어색해질 즘, 엄마가 먼저 눈물을 터뜨렸다. 나를 끌어안고 엉엉 우시는 엄마 뒤로는 아빠와 남편이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래, 우리 눈 마주치지 않기로 해!’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휠체어에 탄 채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는 시간을 갖는다. 곧 내 옆으로 휠체어를 탄 다른 수술 환자가 들어왔다. 나이가 지긋이 든 분이었는데, 옆 간격이 넓기도 했고, 그분도 나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 마음이 복잡할 듯하여 말을 걸거나 하는 상황은 만들지 않았다. 수술 대기실의 온도가 낮아 담요 하나씩 얻어 무릎에 걸치고 대기를 이어갔다.

이제 수술 대기실 자동문이 열리면 내가 수술을 받아야 하는 수술실까지 긴 복도를 지나가야 한다. 휠체어에 앉아 이번에도 역시 간호사가 수술실까지 바래다주고 있다. 녹색 수술복을 입고, 크록스를 신은 의사들이 내 옆을 바쁘게 스쳐 지나간다. 눈을 마주치는 의사도 있지만, 피곤한 듯 시선을 떨어뜨리는 의사들이 대부분이다.


한참을 가도 내 수술실은 나오지 않았다. 코너도 많이 있었고, 방향전환도 많이 했던 것 같다. 수술실을 실제로 볼 일이 또 있을까 싶어, 휠체어를 탄 채 두리번두리번 구경 삼아 보기도 했다. 복도를 한참 지난 후, 한 코너에 생각보다 작아 보이는 수술실로 들어왔다. 추웠다. 같은 색 수술복과 마스크를 한 사람들이 5명 정도 있었다. 하지만 내 주치의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마지막에 나타나실 모양이군.’


환자복 상의를 탈의하고 누웠다.

“오늘 어디 수술하시나요?”


“왼쪽 유방암 수술이요.”


확인 차 묻는 의사의 질문에 ‘왼쪽’을 강조하여 말한 것 말고는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취 시작합니다.”


눈을 다시 떴을 땐, 병실이었다. 내 옆에 남편이 있었고, 엄마, 아빠가 계셨다. 내 가슴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아, 이제 정말 가슴 한쪽이 없구나...'


후회하기엔 나 자신을 제외한 가족 모두 암세포를 제거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는 듯했다. 수술 직후, 후유증으로는 왼쪽 날개뼈가 뻐근하고 아팠으며, 감정기복이 심했던 거로 기억한다. 이런 상황에 이렇게 가족들을 내 옆에 있게 한 것이 갑자기 너무 미안해져, 서글프게 울기도 했다.


*********

수술 직 후, 유방암 병동에 자리가 났다고 하여, 병실을 옮겼다. 아직 다리는 멀쩡했지만, 이번에도 휠체어를 타고 이동했다. 처음에 들어간 곳은 6인실이었다. 6인실을 거쳐, 2인실에 자리가 났다고 하여, 2인실로 옮겼다. 입구 쪽, 즉, 화장실 쪽이었으며, 미니 냉장고 때문에 보호자 침대가 지나다니는 통로에 삐죽 나와있어, 보호자 발이 커튼 밖으로 나오는, 보호자도 불편하지만, 지나다니는 옆 환자 및 보호자도 불편한 그런 자리였다. 하지만 진짜 불편한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옆 칸 유방암 환자의 가족이었다.


전라도 남원에서 왔다는 그 가족은 엄마, 아빠, 딸의 구성으로 엄마의 오른쪽 유방암 수술을 위해 먼 길을 올라왔다고 했다. 엄마와 아내의 간호를 위해 왔을 그 부녀는 다시는 환자 가족으로 만나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딸은 쉴 새 없이 욕을 섞어 가며, 큰 소리로 친구와 통화했고, 그 남편이라는 사람은 새벽마다 고주망태가 되어 병실에 돌아와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며, 여기가 여관방이라도 된 것 같이 편하게 기절했다. 아직 남편이 오지 않았다며 새벽까지 병실 불을 켜 놓는 그 환자 아주머니도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은 그 가족의 친척들이 몰려와 몇 시간을 떠들다 갔다.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들어와 침대를 둘러싸고 수다를 떠는 모습은 친척 분 들 시간을 나눠서 한 두 분씩 방문하게 하고,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하거나, 아니면 휴게실로 자리를 옮겨서 대화를 이어갔던 내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당신들이 계신 곳은 병실입니다. 댁에서 명절 모임을 하듯이 그렇게 떠드는 것은 참 이기적인 행동입니다. 옆 자리엔 또 다른 환자가 치료와 회복을 위해 누워 있습니다. 여긴 1인실이 아닙니다.’


드디어 그 환자와 가족이 퇴원하는 날이 되었다. 퇴원 수속을 하며 짐을 싸다가 병원에서 구입한 삼선 슬리퍼를 어디 버릴 곳을 못 찾더니 선물이라며 주고 갔다. 끝까지 진상 매너를 보여준 가족이었다.


‘그 어디서도 다시 보지 맙시다.’


그리고 방금 퇴원한 환자와 비슷한 나이대의 환자가 바로 그 자리에 들어왔다.


‘내 또래 환자는 볼 수가 없네…’


나이대는 그 전라도 유방암 환자 아주머니와 비슷했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그 환자 분도 그 환자 분의 가족도 참 조용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아는 사람들 같았다. 좋은 병실, 좋은 동지를 만나는 것도 새삼 큰 운이라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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