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디로~ 갈까나. 내 님~을 찾아~서 어디로~ 갈까나 ♬
산자락의 모퉁이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노라면 엉겁결에 흘러나오는 노랫가락이 생뚱맞게도 처량합니다. 도대체 님은 어디에 있길래 남의 속을 이리도 새카맣게 태워 숯덩이로 만든단 말입니까. 무정한 것이 그리움이라 그 마음이 노래가 되는 일이란 응당 구슬픈 가락이어야 제맛인가 봅니다. 그런데 어쩌지요? 모두 다 하나씩 자신만의 님을 품고 사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문학이나 예술의 영역이든, 현실에서건 님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거창하게도 상처 입은 조국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못내 그리운 연인이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갈구하는 자신만의 특별한 무엇이기도 한 까닭입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누구든, 또는 세속적인 욕망이든, 아니면 이상 속의 또 다른 무엇이든 각자는 자신만의 님을 소중히 품에 안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내 님은 어디에 있을까. 굳이 님이라 부를만한 무엇이 있기는 했던가.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은 어느 한때, 이런저런 세속적인 욕망에 휩쓸려 다니던 시절이 떠올라 허탈한 웃음을 짓고 맙니다. 그 시절에는 그러한 비루한 욕망조차도 님이라 여겼었던 거지요. 이후 늦게나마 깨달은 바는 그런 세속적인 욕망을 이룰 그릇도, 자질도 없었다는 뼈아픈 자성이었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산골로 물러나, 산자락이라는 변방에 머물며, 그곳에서 님을 그리워하는 신세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산자락에 머물며 깨닫는 바는 이곳에도 나의 님이 있었구나, 그 대상은 바로 고요였습니다.
무한 고요가 드리워진 산속의 적막은 그 자체로 도시의 소음 속에서 늘 그리워하던 무엇이었고, 한편으론 막연하기만 하던 또 다른 그리움을 자아내는 물레이면서, 길쌈하는 여인네의 손길이 뽑아내는 비단실처럼 무한 창조의 공간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멀리 보이는 산처럼 고요히 머무르매 스스로 삶의 향기를 찾아내고, 그 향기가 실이 되어 삼베가 되고, 무명베가 되어 천지를 휘감으며 펄럭이는 사고의 확장이 그곳에 있었던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고요는 비워서 채워진 공간이 건네는 편안한 위로이면서 창조의 공간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볍디 가벼운 세상사의 숱한 욕망들이 쏟아내는 격한 소음들이 물러난 자리에 자연이라는 푸르름이 들어차고, 그 푸르름이 쏟아내는 고요야말로 성찰과 자각의 시간이면서, 탁한 물이 스스로 맑아지는 자정(自淨)의 시간이었으며, 한편으론 배움의 시간이기도 했던 까닭입니다.
선인들은 고요는 ‘홀로 있음’이고, ‘비움’이라 했습니다. ‘비어 있다’ 함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특별한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전 단계라 했습니다. 비워야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어 있어야 쓸모가 생깁니다. 그릇이 비어 있기 때문에 그 쓰임새가 생기고, 벽에 구멍을 내어 비어 있는 자리는 안과 밖을 연결하는 창문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고요 속에 머물며 사사로운 욕망을 비워낼 때 가치 있는 삶을, 또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법이니까요. 법정 스님의 조언처럼 ‘텅 비어야 영혼의 메아리가 울리고, 텅 비어야 새로운 것이 들어찰 수 있으니‘ 말입니다.
고요 속에 머무르며, 비움으로써 스스로를 채워가는 삶은 순간순간 새롭게 피어나는 꽃 같은 삶이라 했습니다. 그 방법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발밑을 살피며 걸어가는 것’이라 했고요. 발밑을 살피는 일이란 발밑에 놓여 있는 자신의 존재를 깨닫는 일입니다. 그 존재는 ‘지금, 이 순간의 나‘이고, 지금, 이 순간이라는 당장의 삶을 살아야 하는 그 한 사람일 것입니다.
움막의 툇마루에 앉아 비 개인 하늘로 돌아가는 희뿌연 구름을 바라봅니다. 올 때도 그랬듯 갈 때도 기척도 없이 가는 구름의 무심함이 마음의 그물에 파닥이며 무언가 흔적을 남깁니다. 새삼 고요는 적막함이나 공허가 아닌 변화와 조화, 그리고 나아가 발전을 도모하는 생장(生長)의 시간임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됩니다.
좋은 날, 고요한 날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