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2

인생이 마음먹은 대로 될 수 있을 줄 알았지?

by 지니


“보들레르는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도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에 자신의 손을 비추어보며 길고 섬세한 손가락을 탐미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대.”

아직 사춘기에도 이르지 않은 어린 나에게 어머니는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의 불꽃같은 삶과 불행했던 죽음을 얘기해 주시곤 했다.


방탕하고 엽기적인 기행들로 채워진 시인의 삶과, 기이하고 혐오스럽기까지 한 그의 시어들 속에서 섬광처럼 번쩍이는 탐미와 예술적 전율은 이십 대의 나를 매료시켰다. 때때로 시집 ‘악의 꽃’을 읽다가 보들레르처럼 가만히 내 손을 창에 뻗어 보며 그 천재 시인처럼 손이 아름답게 생긴 남자와 사랑에 빠지리라 마음먹었다.

대학 4학년 때 신촌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대학생들 시위로 버스를 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같은 목적지를 향하는 남자와 합승해서 어렵사리 택시를 탈 수 있었다. 목적지에 도달해 택시에서 내렸을 때, 그 남자로부터 커피 한 잔 함께 하자는 수줍은 제안이 들려왔다. 이런 청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 세련되게 거절하거나 응하는 방법을 순발력 있게 생각해 낼 수 없었던 난감한 상황에서, 그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크고 선량한 눈을 한 얼굴이 스스로의 제안에 자신도 놀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까운 찻집을 찾아 그 남자는 성큼성큼 앞서갔다. 충동적인 자신의 제안을 저 남자는 후회하고 있을 것 같았다. 서툴게도 여자를 뒤에 두고 빠른 걸음으로 혼자 앞서가는 멍청이를 나는 부지런히 뒤쫓아 갔다.

처음 만난 남자와, 처음 간 찻집에서 쉬지 않고 떠들었다. 마치 십 년 만에 만난 형제가 그 사이 살아온 날들을 가슴속에서 끄집어 내 듯 이야기보따리를 풀어헤쳤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너 댓 시간을 보냈지만 그냥 헤어지기에는 아직도 할 말이 많았다.

대뜸 이 남자의 손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보들레르의 손, 단정한 손톱에 길고 하얀 예술가의 손을 갖고 있다면 난 이 남자와 결혼할 것 같다는 맹랑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바지 주머니에 꽂은 그의 손은 좀처럼 볼 수가 없었다.

헤어지기 직전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했다. “손 좀 봅시다.”

당황한 그 남자는 “손금을 볼 줄 아나요?” 하며 손금이 있는 손바닥을 나에게 내 보였다. 손금을 보는 척하며 그의 손을 보았다. 아뿔싸... 그의 손은 내가 기대했던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의 날렵한 얼굴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투박하고 못생긴 손이 아닌가. 그는 내밀었던 손을 다급하게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손이 못생겼죠? “ 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 인생의 아이러니라니...

마음먹은 대로 인생을 살 수 있는 줄 알았던 어리석은 믿음에 금이 쩍 갈라지는 소리가 심장 깊숙한 곳에서 섬뜩하게 울렸다..

그 순간 느꼈다.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 아름다운 손을 이상형의 조건으로 생각했던 내가 이 손이 못생긴 남자와 결혼하게 되리라는 것을. 인생이라는, 예측할 수 없는 격랑 속에 난 이미 한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을. 그 격랑 속에서 이 남자를 사랑하며 살게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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