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축제

일상이라는 괴물

by 지니


5년 전 스페인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로 가는 도보 순례길에서였다. ‘산 후스토 데 라 베가’라는 마을 근처에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벌판, 천막을 드리운 흙바닥 위 허름한 침상이 그의 집이었다. 집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그의 처소는 색색이 종이꽃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나무 그루터기를 잘라 만든 작은 테이블들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조롱박처럼 생긴 서양배, 어린애 주먹만 한 사과, 오렌지, 바나나, 포도 같은 온갖 과일들이 올망졸망 작은 바구니에 담겨있었다. “무료, 마음껏 드세요!” “기부하세요!”라는 팻말과 함께.


어림잡아 삼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이목구비가 잘생긴 남자였다. 검은 머리칼에 깊은 푸른색 눈이 참으로 절묘한 신비로움을 풍겼다. 젊은 여자들처럼 어깨너머까지 길게 자라 있는 머리칼을 반쯤 잡아 위로 묶은 모습은 보헤미안 그 자체였다. 벌판을 달구는 봄 햇살 아래 까맣게 탄 날씬한 몸과,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 건강미를 풍겼다. 제일 눈길을 끄는 것은 보는 사람조차도 함께 젖어들 것만 같은 그의 행복에 겨운 표정이었다. 들판의 온갖 야생화와 쏟아지는 화사한 봄 햇살, 함빡 웃는 그의 얼굴이, 초라하고 엉성한 그의 거처를 축제 마당으로 둔갑시켰다. 그는 큰 수박을 하나 내오더니, 칼로 잘라 달큰하고 시원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박 조각들을 순례 여행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었다. 기부함을 모른 척하고 이것저것 무료 과일을 즐기는 사람, 기껏해야 10, 20 센트 동전을 넣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나누어 주는 인심에, 모두가 웃고 떠들며 즐거웠다. 행복을 전염시킬 듯한 이 남자의 에너지가 허허벌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순례 여행을 떠올릴 때면 그 남자는 나의 여행 이야기의 빼놓을 수 없는 몇 명의 주인공 중 하나였다. 속세의 욕망과 짐을 다 벗어던지고, 매일을 축제처럼 사는 젊은이. 기껏해야 몇 센트 동전들로 채워진 기부함으로 일용할 양식만 마련되어도, 순례객들과 즐거움을 나누는 일로 행복에 겨운 기인. 별을 바라보며 잠을 잘 수 있는 거처가 더없이 만족스러운 보헤미안. 초라한 행색도 가릴 수 없는 그의 잘생긴 얼굴과, 행복감에 불 켜진 듯한 낯빛. 소설 속에나 나올 만한 인물 아닌가.


작년 가을에 다시 같은 순례길을 따라 도보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 마을을 지나가면서 그는 순례객들에게 무료 과일을 나눠주며 여전히 축제 같은 삶을 살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바로 그 길 위 같은 자리, 예전과는 다른 큼직한 테이블 위에 과일 바구니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한가운데에는 모양을 갖춘 기부함이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었다. 크진 않지만, 집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건물이 두 채나 세워져 있고, 열려 있는 문틈으로 한 젊은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궁금한 마음에 여자에게 5년 전 방문 했던 사람인데, 이곳 남자 주인은 어디 갔느냐 묻고 있는데, 그가 건물 뒤편에서 예전의 그 맨발로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잘생긴 이목구비, 날씬한 몸매, 묶어 올린 검은 긴 머리칼. 5년 전 그대로였다. 그러나 아뿔싸... 더 이상 축제가 아니었다. 행복감에 도취되어 환했던 그의 안색은 이미 불이 꺼진 지 오래된 듯했다. 그에게 5년 전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권태로운 듯한 표정으로, 남의 사진을 보듯 별 관심이 없었다. 반가웠던 마음에 흥분하며 사진을 들이밀었던 나는 그만 머쓱해졌다. 그는 스페인어를 제법 하는 내가 여행 가이드인 줄 알고, 자꾸 한국 여행자가 오늘 몇 명이 더 올 거냐며 성마르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씁쓸한 마음에 기부함에 몇 유로 넣고는 돌아서 나왔다.


왜 그의 얼굴을 밝히던 빛은 사라졌을까? 소박하나마 집이라 부를만한 건물도 갖게 되었고, 함께 지낼 어여쁜 동반자도 생겼건만, 그의 축제 날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를 다시 보기 전까지 나는 마음속으로 그의 삶을 동경해 왔었다. 매일이 잔칫집 같고 매일이 축제 같은 삶. 남에게 베풀고, 남에게 도움받는 삶. 나도 이름 모를 작은 산골 마을에서 저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다. 남은 길을 걸으며 내내 씁쓸한 마음을 곱씹었다.


그에겐 축제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되어버린 것일까. 어쩌다 축제장을 방문한 사람들은 행복감에 취해 어린아이처럼 눈이 둥그레지고 실없이 웃고 들뜨지만, 축제장의 상인들에게는 지겨운 일상일 뿐인 것처럼... 벌판 위 오아시스 같았던 그의 무료 과일 뷔페는 어느새 생계를 위한 사업장이 되어버렸다. 단순하고 소박한 이 축제는 시작한 지 몇 년 만에 타성과 권태라는 거대한 괴물이 되어 그의 얼굴에 넘쳐나던 환한 빛을 모조리 꺼버린 것이다.


아, 징그러운 일상이라는 괴물 앞에 우리는 이렇게 무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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