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 km 도보 여행을 끝내며
캄캄한 새벽, 헤드 랜턴을 켜고 길을 나선다.
뜨거운 커피 한잔으로 데워진 몸이 날아갈 듯 가뿐하다. 오늘 하루가 내게 선사할 모든 순간을 하나도 빠짐없이 받아들일 터이다. 가슴이 떨린다.
처녀지를 밟듯 설렘과 조바심을 안고 숲길로 들어선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 이슬에 젖은 풀 내음과 낙엽 냄새가 박하처럼 싸한 유칼립투스 나무 향에 섞여 숲 속 컴컴한 어둠 속에서 더욱 진하다. 욕심스레 깊이 들이마시는 내 숨소리와 간밤 이슬로 폭신하게 젖어있는 오솔길 위 발걸음만이 산새들도 아직 깨지 않은 이 새벽 숲의 정적을 깨뜨리고 있다. 울창한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숲의 검은 실루엣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하늘에서는 소곤대던 새벽 별들이 숨을 죽이고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우주가 섬세하게 조율한 듯한 자연의 향연 속에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기지개를 켠다. 나무 사이로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새벽하늘. 수풀 더미 속 막 잠에서 깬 산새의 게으른 노랫소리가 만들어내는 작은 전율. 조용히 차오르는 벅찬 행복감에 가슴이 터질 것 같다.
한참이나 계속되는 가파른 오르막을 오른다. 습습 후 후 반복되는 내 숨소리가 빠른 리듬을 만들며 발걸음에 박차를 가한다. 몸이 더워진다. 셔츠가 땀에 젖는다. 숨이 꼴딱 목까지 차오르는 순간, 오르막 정상에 도달한다. 꼬박 7일 180Km를 걸어야 하는 메세타 고원. 동서남북 나무 한 그루, 작은 구릉 하나 없이 무한히 펼쳐진 지평선에 숨이 멎는다. 추수가 끝나 갈아엎은 밀밭으로 무한 광대한 지평선이 붉은 화성을 연상시킨다. 태양은 사정없이 내리쬐고 숨을 나무 그늘조차 없다. 이미 아픈 지 한참 된 낡은 무릎으로 절뚝절뚝 밀밭 사이 돌투성이 길을 걸어간다. 하늘과 땅과 나만 있다. 하늘과 땅과 나와 무릎 통증만이 있다. 어느새 익숙해진 고통을 친구 삼아 끝이 없을 것 같은 길을 걸어간다.
숙소를 향해 계곡 마을로 내려가는 길, 작은 숲이 포근히 품을 열어준다. 족히 수백 년은 된 참나무와 밤나무에서 툭, 툭, 열매들이 떨어진다. 탐스러운 도토리와 밤송이들이 온통 숲길을 덮고 있다. 모양이 예쁜 것들로만 주워 모아도 금세 주머니가 꽉 찬다. 보석을 주운 듯 부자가 된다. 바로 그때 귀를 간질이는 계곡 물소리. 까르르 웃어대는 소녀들처럼 수풀 사이에 숨어 재잘거리며 흐르고 있다. 아리도록 차가운 그 가을 계곡물에 고단한 수고로 뜨거워진 발과 아픈 무릎을 담근다. 자오선을 한참 지난 오후 햇빛은 나뭇잎에 부딪쳐 부드럽게 산란하며 내 얼굴에 쏟아지고, 멀리 산비탈 목초지 소떼들의 워낭 소리가 만든 교향악이 바람결에 실려온다. 이 순간, 무엇을 더 바라랴. 아무것도 아쉬운 것이 없다.
절뚝거리며 걸어온 천 킬로미터, 스페인 서쪽 땅끝마을 ‘피니스테레’ 바닷가 절벽. 대서양 수평선에 붉은 해가 걸려 있다. 지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 수평선 위에서 머뭇거린다. 강렬한 휘광을 다 버리고 마지막 타오르는 불씨처럼 온 힘을 다해 붉디붉은빛을 토해내고 있다. 내 얼굴이, 긴 여정을 함께한 그의 얼굴이, 지는 해의 노을빛에 붉게 붉게 물든다. 겪어 왔던 모든 고통과 즐거움의 서로의 증인이 되고자, 함께 이 바닷가 석양 속에, 해가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염없이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