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 작은 집

by 지니

동네를 감싸고 있는 안산(鞍山) 동쪽 자락, 이 집을 향합니다. 수백 년 묵은 회화나무 아래에 100년도 넘은 작은 한옥이 숨겨져 있듯 자리 잡고 있습니다. 스쳐 지나가도 모를 만큼 눈에 띄지 않는 낮고 작은 대문 안을 들어서면 ㅁ자 아담한 마당이 포근하게 품을 열어 반겨줍니다. 방금 물을 주었는지, 어린 딸아이에게 하듯 말금하게 가꾼 화단의 화초와 나무들이 잎마다 물을 머금고 있습니다.

쪽마루에 앉아 마당 위 네모난 작은 하늘을 바라봅니다. 작은 마당의 욕심 없는 주인은 하늘도 욕심내지 않나 봅니다. 집 뒤 숲에서부터 불어오는 푸른 바람에 집 지붕을 덮고 있던 회화나무가 잎들을 부딪치며 솨-아 소리 낼 때, 처마 끝에 매달아 놓은 풍경이 딸랑 샘물보다도 더 맑게 흔들립니다.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백팔 번뇌로 뜨거워진 정수리가 시원해집니다.

부엌문이 열리며 안주인이 나와 반깁니다. 요란스럽지 않은 반색에 마음이 편안합니다. 손수 장을 보고 차려낸 정갈한 밥상 앞에 서둘러 나를 앉힙니다. 손이 많이 가는 온갖 나물 반찬들과 따뜻한 국 앞에서 왠지 목이 멥니다. 짜지도 달지도 맵지도 않은 슴슴하고 순한 음식들이 텅 빈 마음만큼이나 비어있던 속을 따뜻이 채워줍니다.

부엌을 지나 뒷마당으로 가면 이 집 바깥주인이 공들여 지은, 사람 서넛이 들어갈만한 다실이 있습니다. 좁은 계단을 올라 천장이 나지막한 다락방처럼 생긴 이 공간에 들어서면 주인이 오랜 세월 훈증하며 즐겨온 침향 냄새가 코를 즐겁게 합니다. 다실의 삼면에는 낮은 창이 나 있는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으면 창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고색의 검푸른 지붕 기와가 그 어떤 그림보다도 더 아름답습니다. 지붕 기와 위로 회화나무 잎 몇 개가 바람에 나선형 원을 그리며 떨어져 뒹굽니다.

바깥주인이 정성 들여 차를 우립니다. 다기 사이를 오가는 그의 손이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 손과 닮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두 손 모아 받아 든 보이차의 향기를 맡습니다. 아, 촉촉한 흙냄새가 납니다. 깊이 들이마시는 향이 폐포까지 도달하는 느낌입니다. 차 한 모금 머금어 입안에서 굴리니 쌉쌀함 뒤에 은은한 단맛이 미뢰에 남습니다. 생명수를 마시듯 나는 사양 않고 차를 마십니다. 한 모금 두 모금 한 잔 두 잔에 몸이 따뜻해지고 메마른 푸석한 피부에 땀이 송송 맺힙니다. 멀리 산속 절에서 저녁 타종 소리가 들립니다. 다시 살아난 느낌입니다.

다시 ㅁ자 마당에 서 네모난 하늘을 바라봅니다. 어스름한 저녁 하늘에 초승달이 걸려있습니다. 보살 같은 안주인이 맛깔스레 익은 묵은 김치를 싸서, 돌아가는 내 손에 쥐여 줍니다. 처마 끝 풍경 소리를 뒤로 하고 보물처럼 김치 단지를 안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숲 속 이 작은 집과 그 주인들을 생각합니다. 억겁의 인연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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