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눈빛 흔들리지 않게 널 바라보며 서 있을게"
음향제어실에서 맡은 임무는 끝났지만 당장 내려갈 생각은 없었다. 아직 순서가 오지 않았기도 했고 이것저것 만지다 보니 무대 연출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잔잔한 전주에는 빛의 세기를 줄이거나, 기타 솔로 같이 집중을 요하는 구간에는 핀 조명을 비춰주는 게 최선이긴 했다) 밴드부는 13명으로 구성된 조촐한 인원이었지만 공연을 위해 결성한 팀이 4개나 있었다. 각자 취향이 달라 목소리 큰 사람들이 팀을 하나씩 만들기 시작했고 (덕분에 여러 팀에 속해 공연을 해야 했다) 조금씩 늘어났다. 결과적으론 각양각색의 곡으로 꾸며진 좀 더 긴 러닝타임의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공연이라는 타이틀이 부끄럽지 않게 됐다.
무대의 반대편, 2층에 위치한 음향제어실은 재밌는 곳이었다. 영화 속 오래된 성에 있을법한 나선형 계단을 오르면 낡은 철문이 앓는 소리를 내며 지키고 서있었다. 방 하나도 되는 크기의 공간에 SF 영화의 우주선 같은 유리창과 온갖 제어 장치가 곳곳에 있었다. 여러 세션의 소리가 골고루 들리도록 음을 키우거나 줄일 수도 있었고, 특정 세션의 소리만 들리도록 설정할 수도 있었다(누가 틀리고 못하는지 감시의 목적이 있다) 무대를 마음껏 손질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나름의 권력이 있는 곳이었다.
큰 유리창에서 내려다본 무대는 작았지만 몇 분 뒤 저곳에 올라가 작은 구성원 중 하나로 있을 생각을 해보니 다시 손이 차가워지는 듯했다. 소강당 내부로 내려가지 않은 데에는 여전히 떨리는 손을 달래려는 핑계도 있었다. 손 끝에서 내뿜는 미세한 진동은 온몸을 냉기로 가득 채웠고, 심장을 더욱 빨리 뛰게 했다. 한 팀의 무대가 끝나고 무대가 밝아지자 아래 객석에 앉은 사람들을 훑으며 내려다봤다. 박수와 환호로 호응하고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 형체만 겨우 보이는 수준이었는데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친구들과 같이 앉아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 웨이브 있는 머리와 다르게 포니테일을 하고 있었고 (머리 묶은 모습은 처음 봤기도 하고 잘 어울려서 오래 기억에 남는다) 얇은 베이지색 가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단정하지만 축제스러운 코디가 눈에 서성이게 만들었다. 음향제어실에 있던 탓에 인사도 못 해줬구나 싶던 순간, 눈이 마주쳤고 그녀가 한가득 웃는 미소로 까딱하고 인사를 건넸다. 황급히 손을 들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일행에게 돌아가 있었다. 아쉬운 마음이 들어 다시 친구들에게 돌아간 그녀의 미소를 한참 바라봤다.
아쉬운 마음도 잠시, 다음 순서가 되자 달리다시피 황급히 내려가 기타가 놓인 좌석 맨 앞자리에 자리 잡았다.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리곤 옆자리에 놓은 기타를 한번 쓸어내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기타를 움켜쥐고 무대에 오르며 깊고 긴 한숨으로 긴장을 풀었다. 기타, 특히 일렉기타는 참 신기한 존재다. 어떻게, 무엇을, 어느 정도의 양으로 먹이느냐에 따라 다른 목소리를 낼 줄 알았고 그 소리에 따라 왼손을 움직이면 가장 듣기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공연을 좋아하게 된 계기도 그 이유에서였다. 때로는 위로를, 때로는 슬픔을, 때로는 희망을 주는. 선율에 빠져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게 빠져들게 만드는 존재였다.
"안녕하세요"
보컬의 짧은 인사와 함께 각 세션의 구성원을 소개해주며 악기세팅 할 시간을 끌어주었다. 눈을 마주치며 끝났음을 알렸고, 드럼의 93 bpm 매트로눔 박자와 함께 곡이, 무대가 시작됐다. 단상에 올라 떨렸던 몸은 관중의 시선 속에 온기를 찾아 안정적인 연주를 이어갔고, 환호를 받기에 충분했다.
'됐다!'
한 곡이 끝나자 안심하며 속으로 외쳤다. 공연의 승패는 첫곡에서 갈린다. 큰 실수 없이 첫 번째 무대를 마쳤기에 뒷 무대는 그저 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호응을 위해 무대 앞까지 불러 모은 관객들 속에 힐끔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꽤나 즐거워 보였다. (그때 나도 모르게 웃은 탓에 물고 있던 피크를 잃어버렸다.) 어떻게 지나가버렸는지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준비한 무대가 끝났다.
5시 35분. 후련했다. 열심히 준비했던 탓에 아쉬움도 있었지만 실수 없이 끝낸 것에 만족했다. 지난 몇 주간 동방에서 지낸 보람이 있는 공연이었다.
"너무 재밌었어! 실수 없이 잘하던데?"
한껏 공연을 즐긴 표정의 그녀가 해맑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 표정을 보자 긴장이 한순간에 풀리는 듯했다.
"고마워."
최대한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지닌 감정의 100분의 1도 되지 않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기타를 놓고 후련하게 남은 공연을 즐기기 위해 맨 앞자리 왼쪽 구석에 앉았다. 그녀도 옆에 와서 앉았다. 실력이 좋았던 그녀는 여러 팀에 속해 남은 공연이 있었지만 전혀 긴장된 느낌이 없었다.
"마지막 무대인데 긴장 안돼?"
주섬주섬 기타를 정리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다시 봐도 덤덤해 보이는 표정이었기에 실은 공연 경험이 많은 배테랑이 아닐까 싶었다.
"아니? 전혀!"
오히려 웃으며 평소보다 업된 텐션을 보이는 그녀가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괜히 긴장하며 덜덜 떨던 스스로가 무안했다.
"나는 엄청 떨리던데.. 대단하다"
그녀를 바라보자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숨겨둔 긴장된 마음이 술술 흘러나왔다. 무대를 제외하고 암흑으로 뒤덮인 곳이었지만 그녀 덕분에 한껏 밝은 느낌이었다.
"오늘 하루가 실감이 잘 안 났어"
기타 가방을 놓으며 가장 멋없이 공연소감을 얘기했다. 잘하고 싶었음에도 문제없이 끝난 부분에 만족했다. 조금씩 얘기를 하자 아침부터 붕 뜬 기분이 조금씩 내려앉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고 손으로는 드럼박자를 맞추며 까딱였다. 아직 남우 긴장감에 경직된 눈과 입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무대로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아직 남은 무대로 시끄러웠기에 대화를 더 나누기엔 힘들었던 탓도 있다. 그녀와 함께 앉아 좋아하는 곡을 듣고 있으니, 은은하게 비치는 조명 사이로 흩날지는 먼지들 조차 아름다워 보였다.
"와-"
다시 한번 환호와 박수가 나왔고, 그녀가 무대로 올라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땀이 났는지 바지에 슥슥 손을 문지르며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긴장은 안된다고 했지만 아주 조금은 걱정이 되는 듯했다. 앞으로 지나쳐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잘하고 와' 하고 뻐끔거렸다. 그 순간, 길고 가늘지만 다소 굳은살이 배인 그녀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가볍게 그녀의 검지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이상했던 오늘 하루의 원인을 깨달은 듯 내뱉었다.
"이제 실감이 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