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 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리에게 우리는 없었겠지
3월, 봄과 함께 기다리던 개강도 찾아왔다.
대학의 개강 분위기는 인터넷 속에서 봐왔던 되도록 멀리하고 싶어 하는 것과 다르게 파릇하고 상쾌했다. 더군다나 기존에 겪어왔던 3월의 무겁고 어색한 분위기와 다르게 새롭고 화창했다. 대학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홀로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나름대로 독립이라는 것을 시작해서 그럴지도 모를 일이다. 남자만 득실거리는 편하고 재밌지만, 긴장감이라곤 전혀 없는 야생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기에 문명의 이기 같은 다른 이성의 존재란 매 순간 떨림으로 가득하게 했다.
대학이 주는 특유의 설렘과는 다르게 나는 크게 문명에 발을 담그지 못한 원시인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아마 기숙사에 살지 않았다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표류한 거나 다름없었을 거다. 다행히도 같은 방을 쓰는 친구들 덕분에 겨우겨우 인맥을 유지하며 살아갔다. 학과 내에서 어떤 행사가 있는지 대학교에서 어떤 생활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정보통이자 SNS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런 내가 삶에 흥미가 생긴 건 개강총회를 간 덕분이었다. 개강총회라는 건 흔히 인싸라 불리는 친구들이나 가는 정신없는 행사라 생각했다. 개강 첫날이라 당연한 부분일 수도 있었지만, 친구도 거의 없고 술자리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갈 이유가 전혀 없는 곳이라고만 생각했다. 같은 이유로 아마 기숙사에 살고 있지 않았다면 개강총회에 가자는 친구도 없었을 것이고 그런 곳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을 거다.
"나도 아는 사람 없는데 그냥 가는 거야. 우리도 다른 친구들 좀 만들어야 할 거 아니야!"
비교적 활발한 성격과 넓은 행동반경 덕분에 아는 사람도 교정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빠삭했던 준재가 나의 답답함에 단단히 화가 난 말투로 얘기했다.
"하.. 그럼 나는 조금만 있다가 일찍 들어갈게."
그 당시만 해도 어색한 공기를 못 견뎌하는 성격이었기에 그다지 구미가 당기는 제안은 아니었지만, 친구의 간절한 부탁에 거절하지 못하고 개강총회를 향해 따라나섰다. 저녁임에도 전혀 춥지 않은 기분 좋은 서늘함에 무슨 연유인지 개강총회로 향하는 길이 즐거웠다. 그런 재미도 정신도 없는 곳을 왜 가는지 이해는 못 했지만, 너무 간절해 보이는 마음을 거절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일 생각에 처음 신발 신은 강아지처럼 걸음걸이조차 어색했다. 이미 시작한 지 1시간은 지났고, 짧은 시간이지만 벌써 다들 친해졌을 건데 어색하게 끼어 있는 게 상상만 해도 속이 간지러웠다.
술집의 위치는 기숙사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출입문 유리창 안으로 비치는 내부를 슬쩍 바라보니 괜히 왔나 생각도 들었다. 등을 떠미는 친구에 못 이겨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술집 출입문 특유의 손님을 알리는 종소리가 지저귀었다. 그 소리와 함께 시끌벅적함을 뚫고 어디선가 과 대표가 쏜살같이 달려와 급격히 오른 텐션으로 맞이해 줬다. 각각의 테이블은 서로의 친목을 다지느라 바빴고, 이리저리 테이블을 옮겨가며 자신을 어필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과 대표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난감해하면서도 술기운 탓인지 신나는 발걸음으로 테이블을 둘러보았고, (우리가 활발하지 않음을 알아보고, 비교적 독서실 같은 고요함이 감도는 테이블을 찾는 듯했다) 목표지점을 향해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가 앉을 테이블은 다른 테이블에 비하면 굉장히 어색해 보였다. 마치 식당을 카페로 잘못 알고 들어와 앉은 사람들처럼 보이는 남녀 4명이 앉아있었다.
"자자. 여기로 앉으면 되고, 서로 인사들 나눠."
황급히 테이블에 우리를 던져놓고 떠나는 과 대표가 다소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정신없는 분위기와 너무나도 어색한 상황과 사람들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안녕?"
그때, 테이블 가장 안쪽에서 인사를 건네왔다. 어색해 삐걱거리는 나를 다시 작동하게 해 준 한마디였다. 소리 난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어두운 술집 조명 아래에도 빛나는 미소가 낯선 이들의 합석을 반겼다. 그녀는 시선을 끌어내는, 사람을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사람이었다. 웨이브가 들어간 긴 생머리, 당차 보이는 미소, 살아있는 표정에 사로잡혀 멍하니 바라보다 인사도 제대로 받아주지 못했다. 인생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가 아닐 수 없다.
당연한 수순으로 어색함을 달래기 위해 돌아가며 각자 자기소개를 했고, 그 무리에 스며들기 위해 어색한 미소로 일관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30분가량 이어진 취조로 오가는 질문 속에 지쳐 시선을 환기하고자 돌아본 곳엔 그녀가 있었다. 마주친 시선 속 그녀는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갸웃하며 웃어주었다. 구석에 앉아 있던 탓에 인사를 건넨 이후 크게 대화를 나누지 못한 아쉬움을 해소해 준 그 미소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이후, 모든 시선 끝에는 좀 더 확실히 그녀로 향해 있었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다른 이유로 속이 간지러웠다. 어쩌면 바라보고 웃어주는 그 모습이 다시,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소망이었지만 앞, 옆의 사람들과 얘기하며 웃는 그녀의 미소로도 충분했다.
술집 가득히 울리는 소음의 리듬에 맞춰 모퉁이에 앉은 맘은 어느새 평정심을 되찾았고 이야기의 주제는 새내기 배움터의 추억에서 동아리로 넘어가고 있었다.
"너는 들어가고 싶은 동아리 있어?"
새내기 배움터를 굳이 가지 않았던 이유를 내세우며 가만히 듣고 있던 차에 모처럼 대화에 낄 명분이 생겼다. 그저 기타가 좋아서라는 이유에 밴드부 활동이 하고 싶었다. 겉 멋이 들어서도 아니고, 무대에서 나를 돋보이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밴드 음악이 좋았고 밴드부 활동을 하면 기타를 더 배우고 재미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밴드부"
가벼우면서도 확신의 단단한 대답은 모두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안쪽에 있던 그녀에게 까지도 목소리가 닿았다.
"오! 밴드부 하려고? 나도 재밌어 보여서 생각 중인데."
내가 좋아하는걸 그녀도 좋아한다는 사실이, 취향이 비슷한 부분이 하나라도 있다는 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좀 더 관심이 갔다. 같은 취향에 주체하지 못한 흥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되려 질문을 했다.
"어느 파트 지원하려고? 밴드는 중앙밴드?"
문답을 주고받았을 뿐이지만 들떠서 마구 날린 질문 덕분에 그녀도 밴드음악을 즐겨 들으며 '브릿팝'을 좋아하고 다양한 악기를 조금씩 다룰 줄 알고 조금씩 쳐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밴드부를 하겠다는 확답은 듣지 못했지만 같은 곳에 소속되어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 자리를 신나게 만들었다.
어느 정도 그 자리가 익숙해질 때쯤, 그녀가 핸드폰 화면의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어! 나 가야 해, 막차 막차."
서둘러 자리를 뜨며, 테이블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고 나도 다소 어색한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너도 번호 좀 줘. 다른 애들은 다 있거든."
핸드폰 화면에 뜬 키패드, 보다 밝은 미소와 함께 온 요청을 거절할 수도 애써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밝은 성격처럼 보였지만 생각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그 성격이라면 누구나 쉽게 친해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을 다시 돌려주고 멀어져 가는 뒷모습이 괜히 아쉬웠지만, 언젠가 지나다니며 볼 거고 연락하는 날이 있겠지 생각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과 친목을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렇게 그날은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 소중한 하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