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에게 부치는 한 떨기 마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요한 폴프강 괴태)를 읽고>
베르테르, 나의 친구여. 자네가 빌헬름에게 보낸 편지와, 로테에게 남긴 유언을 읽었다네. 읽는 동안 창 밖에는 자네가 좋아하던 어린 아이들이 때이른 개화 소식에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지. 따스한 봄 한 줌 내 몸에 허락하지 않고 자네의 세심한 진심을 담은 유려한 필체를 읽을 수 있었던 경험은 내게 씁쓸한 행운이었다네. 오해는 말게. 씁쓸하다는 이유는 200년 지난 지금까지 젊은이들에게 자네가 공감을 많이 받은 영향을 탓하는 것이 아니야.
사랑이라든가 우울, 자네가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선택이 누군가의 공감을 필요로 했던가? 신념의 조건은 누군가의 인정일 리가 없지. 다만 자네의 죽음을 읽고 나니 나의 로테가 떠올랐다네. 그 누구에게 고백할 수 있었겠나? 내겐 그녀밖에 없었는데. 자네에게 쓰는 이 편지를 끝내 멈추지 못했다는 것은 누구에게든 말하고 싶은 이 어리석은 욕망을 이기지 못했을 탓이겠지. 나는 이제 책을 읽던 자리에서 조금 더 창문으로부터 멀어진 자리에 앉았다네. 이미 봄의 햇볕은 지고 말았지만 여전히 창 밖에는 이름 모를 꽃의 향기가 너울대고 있을 것이어서 말이야.
그녀는 자애로웠고 너그러웠으며, 안타깝게도 현명하기까지 했다네. 사실 사랑이란 사람을 속좁고 어리석게 만들지. 자네가 우울을 태만의 일종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사랑 역시 누군가는 정신병이라고 말하더군. 하지만 그 말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네. 질병이나 장애는 당사자가 사는 데에 불편을 느끼고, 그를 치료하기 위해 노력할 때에 성립되지 않겠는가? 사랑해선 안 될 이에게 빠져간다는 것을 아무리 부정하더라도 노력은 헛되어지고 말지. 눈 앞이 흐려지고 나서 내가 장애를 세상에 등록하기까지 한참이 걸렸듯 결국 인정해야 하는 것은 본인이어야만 한다네.
시각장애라는 딱지가 내 이름 앞에 처음 붙었을 때 나는 더 이상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겠노라 결심했네. 직전의 연애에서 상대의 부족함을 받아들이지 못한 스스로에게 실망했던 나였기에 세상의 기준에서 부족한 내가 누군가와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 꽃은 마음대로 피지도 못하지만 피는 것을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을 몰랐다네. 그리고 그녀를 만난 거야. 공적인 만남이나마 두서없는 나의 말에 어여쁜 목소리로 귀를 기울여주었고, 이 맘 때 함께 벚꽃길을 걸으며 조심스레 나의 손을 꽃잎에 가져다대어 주었으며, 나와 함께 걷기 위해 팔꿈치를 내어줄 때 그녀의 긴 머리칼이 내 손등을 간질였었지. 허나 두 손이 스쳐 짜릿함을 느껴야 했을 때 그녀의 왼 손 약지에 낀 반지와 스쳤던 절망감을 자네라면 이해해줄 텐가?
짝사랑 정도는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이했다네. 그녀를 만나기 위해 미리 묻혀둔 향수 냄새가 맘에 든다며 장난스레 나의 목에 성큼 다가와 코를 박았을 때 문득 나의 코 끝에도 전해지는 봄의 온기에 나는 무엇이 부끄러워 멋쩍어하기만 했지. 하지만 그녀는 결혼을 앞두고있었고, 나는 그녀를 떠나보내야만 했네. 다행인지 불행인지 혼자는 아니었다네. 그녀는 내 곁을 떠나기 전까지 나와 함께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이 죽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네. 그녀가 자네의 로테보다 내게 흔들리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나의 마음이 그 정도밖에 안 되었던 것인지, 자네의 선택 앞에서 생각해보았다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난 그녀를 더없이 사랑했고 그녀는 그녀의 방식으로 나의 사랑을 받아주었으며, 나는 나의 삶을 희생하지 않고 이별했다네.
자네가 알베르트와 논쟁할 때 자살하는 이들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모습에 문득 코끝이 시큰해지는군. 노란 조끼에 푸른 연마복을 즐겨 입던 자네는 동정받고 싶지 않아하겠지. 그럴 리도 없겠지만 억울해하지는 말게나. 우리는 모두 로테를 사랑하던 농갓집 머슴과 다를 바가 없잖은가? 그 사랑의 모양이 어떤지, 어디를 향해 있는지는 오로지 운에 맡겨야만 한다네. 자네는 거기에 묻혔고 내가 여기에 살아 있는 것은 사랑이 곧 러시안 룰렛과 같음을 말해주는 것이겠지. 스스로의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본 이만이 알 수 있겠지. 그녀는 내게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을 부여해준 셈이라네.
편지를 마무리할 때 즈음 되니 자네는 마주하지 못했던 여명이 밝아오는 시간이 되었군. 오늘의 햇볕도 여전히 내 눈에는 멀 테지만 그 온기와 새소리를 듣기 위해 창문을 열면 봄의 냄새가 내 방에 비집고 들어와 나를 흔들어대겠지.자네도 그녀도 없는 내가 사는 이 곳에서 제법 오래도록 집 안에만 있었다네. 이만 일상이 소용돌이치는 집 밖으로 나가야만 하겠지. 자네가 되지 않기를 선택한 그럭저럭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당신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거든.
사실 자신을 죽이는 것과 마음을 죽이는 것 중에 뭐가 더 비겁한지는 아직도 모르겠다네. 다만 자네의 선택에 내 마음 깊이 자리잡은 묘소에 잠시 들러 꽃 한 떨기 놓아두고 싶었을 뿐이지. 한 가지 바라건대 어제의 일에 관한 오늘의 고백은 모두 잊어주게. 다만 내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 날인지만을 기억하며 살아감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