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식성 경청꾼 Apr 08. 2023

불안해하지 마.

<위 스포트라이트(에이핑크 편)를 듣고>

  서른 살 넘은 아저씨가 여자 아이돌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있을까?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고 하여 따가운 눈초리가 걱정되지 않을 수는 없다. 용기를 내서 고백하건대 나는 에이핑크의 음악을 좋아했다. 스윗 소로우의 콘서트에 가고, 에픽하이의 실물 앨범을 사는 한편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언제나 에이핑크의 신보가 나오면 음원 사이트에서 앨범 단위로 들어왔다. 팬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20대를 함께한 여자 아이돌이라면 단연 에이핑크라는 말이다.

물론 러블리즈나 오마이걸, 드림캐처라는 그룹들까지 신보 소식이 나오면 관심이 가는 걸그룹은 많았다. 다만 내게 있어서 모든 멤버의 이름을 얼굴과 매칭할 수 있는 마지막 걸그룹이 에이핑크였다. 그들의 신보 소식이 더없이 반가웠던 이유는 마지막으로 접했던 뉴스들이 그리 밝은 소식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세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당사자들과 팬들에게 가수로서 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뉴스가 무엇일까? 뭐니 뭐니 해도 자신들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신보 소식이다. 작년에 정은지 님이 발표했던 리메이크 앨범과, 연말에 막내인 오하영 님이 내가 평소 즐겨 듣던 라디오의 대타 디제이를 훌륭히 소화했던 모습은 그들에 대한 나의 애정 역시 건재하다는  방증이었다.


  내가 구독하고 있는 음원 사이트에는 멜론 스테이션이라는 콘텐츠가 있다. 나름 유구한 전통이 있는 콘텐츠로서 루시드 폴이라는 뮤지션은 동화책과 함께 발매한 앨범의 오디오북을 이를 통해 제공하기도 했다. 그중 위 스포트라이트라는 프로그램은 보통 미니 앨범 이상의 신보를 음원으로 발표한 타이밍에 그 뮤지션이 직접 나와 수록곡들과 함께 앨범의 비하인드 등을 나누는 프로그램이다. 즉 그들의 출연 소식을 접했을 때 동시에 반가운 신보 발매 소식을 접한 셈이었다. 더군다나 작년 연말 즈음 카라 편에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있어 기대감이 하늘을 찔렀다.


  1시간 30분, 웬만한 영화 한 편 볼 시간이니 그것에 비유해 보자. 보통 기대감이 높은 영화는 그만큼 재미의 기준도 올라 즐기기가 어렵다. 하지만 기대감을 뚫고 즐길만한 영화라면 누가 뭐라고 해도 나만의 명작 반열에 올릴 수 있다. 롱파티라는 이름으로 멜론 스테이션을 오래도록 진행해 본 리더인 박초롱 님의 프로그램 선창은 잔잔했다. 하지만 금세 공원에 함께 산책을 온 찐친들끼리의 수다가 되었다. 거니는 방향이 같아 오래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다 보면 전혀 모를 이들에게 내적 친밀도가 높아지기도 한다. 처음에 나의 산책로가 그들의 방향과 맞았던 것은 우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1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록 근처에서 들리는 그들의 목소리는 이제는 공원을 거닐 때 반드시 트는 플레이리스트 자체였다.


  내가 아무것도 모를 스물에 '몰라요.'라는 말로 데뷔한 그들은 취업에 떨어졌을 때 '슬퍼하지 마, 노노노!'라는 말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시각장애인으로서 독립하여 사회생활을 하는 내게 두려워하지 말라며 DnD(Do not disturb)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앨범을 소개할 때는 웃음이 마르지 않더니 각각 멤버를 소개해주는 코너에서 김남주 님의 눈물셈이 터진다. 서로를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한 멤버별 랭킹쇼에서 윤보미 님이 한 마디 한 마디가 웃음 버튼이 된다. 각자 인생의 스포트라이트를 소개하는 코너 사이사이 앨범에 수록된 5곡의 모든 노래들을 다섯 멤버들과 함께 즐기기에 최적의 라디오였다.


  프로그램의 마지막 곡은 장수돌을 꿈꾸던 시절의 데뷔곡인 '몰라요'였다. 공백 기간이 거의 없는 진정한 장수돌이 된 그들을 실감케 했다. 걸그룹 전성시대라고 한다. 뭐, 사실 이런 단어는 나 10대 시절부터 나왔던 기억이 난다. 사실 30대 아저씨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 한창 열심히 활동하는 어린 분들이 얼마나 오래도록 아이돌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겨우 독립하여 바람을 맞선 촛불처럼 일렁이는 내 모습이 겹쳐 안쓰럽기도 하다. 하지만 치열하게 살아남은 13년 차 여자 아이돌을 보라. 그들이 전하는 희망찬 메시지를 듣는 동안은  아무것도 불안해할 것이 없다.`

작가의 이전글 자네에게 부치는 한 떨기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