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지 않았다면 몰랐을
<밝은 밤(최은영)을 읽고>
작년 요맘때부터 연말까지 매달 1회의 소규모 독서토론을 주재하였다. 시각장애인이 되었어도 나라는 사람은 변하지 않았다. 수다 떨기 좋아하고 독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독서토론을 준비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작품 자체의 재미만큼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대감도 컸다. 오롯이 집중되는 독서의 재미가 평소보다 쏠쏠하여 떠올랐던 감상이 차고 넘쳤다. 토론을 진행하며 정리될 줄 알았던 이러한 감상은 의견을 나누면서 더해지고 곱해졌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역시 말하는 것만큼 즐거운 것이 글쓰기다. 이 기회에 독서토론의 첫 주제도서였던 밝은 밤의 추억을 끄집어내 보자.
소설은 희령이라는 소도시에 머무르는 지연, 30대인 ‘나’의 상처를 치유해 가는 어른의 성장을 그린다. 한편 지연 할머니의 생애를 일종의 여성이 쓴 역사소설처럼 그녀의 엄마부터 손녀인 지연으로 이어지도록 서술한다. 이 두 서사가 번갈아 가다가 이윽고 마지막에 한 점에서 만난다. 지연이 열 살에 놀던 거북이 해변을 추억하며 시작한 소설이 그보다 먼저 그곳에서 찍은 가족사진 액자를 보여주며 끝난다. 한결 수준 높은 수미쌍관이다. 소설의 초반부에 지연은 이혼한 전 남편에 대해 ‘개새끼’라는 단어를 곱씹다가 문득 자신을 빗대어 우울해진다. 반면 후반부에는 어린 시절에 죽은 언니를 ‘똥강아지’ 같았다고 추억하는 할머니 덕에 엄마의 슬픔을 헤아린다. 그 사이에 귀리라는 유기견을 떠나보내면서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죽은 언니를, 헤어진 남편을, 귀리를 만나지 않았다면, 슬픔을 겪지 않은 삶은 지금보다 훨씬 나아졌을까? 또 다른 서사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자. 우정 이상으로 끈끈했던 증조모와 새비 아주머니는 시대의 상황 탓에 멀어진다. 지연은 그들이 차라리 만나지 않았던 편이 낫지 않았겠냐며 할머니에게 자신의 상처를 내비친다. 하지만 할머니는 새비 아주머니를 기억하는 엄마의 표정은 늘 환했다고 말씀하신다. 슬픔이 있더라도 만남을 선택할 그들이고 자신이었다.
“나는 널 떠난 적 없어.”
귀리를 묻어주고 돌아오는 밤, 지연의 시야가 환해지며 자동차 사고를 당한다. 그때에 그녀가 살아왔던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울 때에는 감당하기 벅찼던 이별과 외로움이 덮쳐온다. 다음 순간 여덟 살 언니의 목소리와 함께 눈부신 햇볕에 밤이 갠다. 지연이 깨어날 때 소설의 제목이 실감 난다. 내가 태어난 해에 발매한 옛 노래 속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라는 가사처럼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도,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도, 잃어버린 시력마저도 모든 이별은 그 자리에서 빛난다.
독서토론을 진행하며 가장 의아했던 점은 작품의 후반부를 지적하는 의견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갈등 해결이라든가 언니의 죽음과 이에 대한 극복을 조금 더 명확하게 묘사하길 바라는 아쉬움이 중론이었다. 진행자라는 역할의 한계 때문에 하지 못했던 반론을 1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 자리에서 밝힌다. 지연의 연구 분야가 우주인 설정에 대해 조금 더 깊게 살펴보자. 소설 안에서 지연의 입장을 빌려 수 차례 우주에 관해 서술한 덕에 개인과 역사의 흐름에 대한 관점이 한결 심도 있게 다가온다. 극장 맨 앞자리에 앉은 지연의 선배와 눈을 맞추어주던 착한 애, 이티마저도 우주에서 온 외계인이다.
요즘도 방송에서 심심찮게 30년 전의 영화를 방영해 주어서인지 조카들도 E.T를 알고 있다. 필자가 주먹을 쥔 채 검지만을 내밀면 조카 역시 자신의 검지를 맞대고는 까르르 웃어준다. 티끌만 한 찰나의 검지 끝 접촉은 어떠한 언어보다 선명한 교감이다. 선배가 지연에게 해주는 토닥임이자 조카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음을 실감하는 손인사이며 나아가 소설의 주인공과 독자가 겹치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는 포옹이다. 우리는 이렇듯 중첩되어 살아간다. 뜬 눈으로 밝은 밤을 지새우는 나, 구한말 시절을 겪어왔던 선조들과 보이저 1호가 찍었던 창백한 푸른 점, 137억 년 동안 팽창하고 있는 우주, 우리의 눈을 통해 우주는 우주를 바라보고, 우리의 귀를 통해 우주는 우주를 듣는다는 말이 있다. 누군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그라는 우주!
소설에서도 언급되는 ‘울트라 디프 필드’는 하늘 전체 면적 중 1천3백만 분의 1에 빈 공간에 불과하다. 티끌만 한 공간에 130억 년 전부터 있어온 은하 일 만여 개가 무엇을 의미할까?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기를 바랐던 지연과 언젠가의 우울한 시기가 중첩돼 있을 독자에게 하는 작가 방식의 위로라면 좋겠다.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면 시간이라는 개념마저 사라질 테지만 ‘내게서 버려진 나는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러한 사실이 다시금 삶을 걸을 수 있는 이정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소설의 끝을 열어둔 이유로 충분하지 않은가? 가족의 죽음, 관계에서의 상처, 그럼에도 바라는 희망을 그리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Life goes on. 소설은 끝나지만 독자의 삶은 계속될 테니까.
모르는 것은 쉬이 반감을 산다. 아주 사소한 풀꽃도 예쁘고 사랑스러운 면이 있을 텐데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이 금세 오해가 되고 폭력이 된다. 하여 엄마와 딸처럼 누구보다 가까울 관계가 누구보다 멀어지기도 한다. 끊임없는 만남과 헤어짐 사이 가장 오래도록 자세히 보아왔을 스스로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필자의 눈에 먼 햇볕과의 작별을 고하기 위해서는 실명과 마주해야 했다. 그 덕에 다시금 좋은 도서를 읽고, 소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늦게나마 글로써 이 마음을 남길 수 있었다. 회자정리에는 거자필반이 따르듯 실명과의 작별 인사를 나누니 ‘밝은 밤’에 눈이 부신다.
독서토론을 한창 진행할 작년 7월, 허블 망원경보다 훨씬 성능 좋은 제임스 웹으로 찍은 원시 우주의 사진이 공개되었다. '울트라 디프 필드'보다 선명한 사진은 지난 1년 간 135억 년 전의 빛까지 담아왔다. 애초에 밝은 별이 아니면 보지 못했던 필자의 세상을 넓힌 허블 망원경은 노쇠하고, 더 좋은 장비로 찍은 사진은 흐리게만 보인다. 허나 눈에 닿지 않는 별들이라고 반짝이지 않으랴? 보이지 않는 밝은 밤이 필자를 꿈꾸게 한다. 헤어짐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그 꿈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로 한다. 가장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보이지 않는 이 별이 내겐 너무나도 소중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