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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성 경청꾼 May 12. 2023

뇌과학을 위해 플레이 볼

<숫자야구 게임을 해보고>

 최근 게임에 빠졌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다. 하루에 한 시간 조금 넘게 즐겜을 하고 나면 머리가 멍해지기 때문에 더 이상 즐기기도 어렵다. 게임의 제목은 숫자야구. 0~9까지의 중복되지 않는 암호를 맞추는 게임이다. 자릿수와 숫자가 다 맞으면 스트라이크, 숫자만 맞으면 볼, 아무것도 맞지 않으면 아웃이다. 예를 들어 문제를 푸는 사람이 123를 제시할 때 1스트라이크 1볼이라는 답을 얻고 142를 제시할 때 3볼이라는 답을 얻으면 421이라는 숫자 조합을 추론하여 정답을 맞히는 것이 가능하다.

사람들끼리 함께할 수도 있다지만 나는 매일 밤 점자정보 단말기와의 한 판을 펼친다. 아마 기계의 개발 회사 측에서 점자를 숫자로 쉽게 외우도록 돕기 위한 게임을 내장한 모양이다. 게임을 틀 때 나오는 'Play ball!'을 들으면 조건반사처럼 피가 끓어오른다. 내가 하고 있는 게임에서 한 판의 기준이란 초급 3자리, 중급 4자리, 고급 5자리의 숫자를 각각 다섯 게임씩 10회 안에 맞추는 것이다. 빠른 회차 내에 맞추면 점수가 늘어나는 만큼 몇 번 게임을 클리어했다고 하더라도 쉬이 게임에 질리지 않는다. 처음에는 10회가 넘어가도록 초중급에서 문제를 틀리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초급은 암산으로도 5회 안에 끝낼 수 있었고, 중급부터는 내가 제시한 숫자와 스트라이크, 볼의 수를 적어두어 7회 남짓에 해결이 가능해졌다. 고급에 다다라서는 본격 두뇌 풀가동이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종종 실패하는 만큼 경우의 수에 따라 추론능력을 극대화시킨다.


 어렸을 적부터 게임을 좋아했다. 한국의 민속놀이라고까지 불리는 스타크래프트 1이나 최근 신작이 나온 카트라이더의 배경음악은 여전히 나의 제일 노동요다. 그러나 단연 나의 취향은 퍼즐 류의 게임이다. 국내의 작은 게임 플랫폼에서 할 수 있던 루미큐브는 승률이 꽤 높았고 피처폰에서는 주주클럽, 스마트폰으로 넘어와서는 나가는 길 찾기를 가장 많이 실행시켰다. 실명하기 전까지는 토이 블러스트라는 게임을 무 과금으로 즐겼다. 2주에 한 번 업데이트되는 랭킹에 드는 기쁨이란 나로 하여금 묘한 자부심마저 들도록 했다.


 오래간만에 게임을 하며 느낄 수 있는 도파민이 짜릿하여 서론이 길었다. 얼마 전 읽었던 두 뇌과학 책이 묘하게 반대되는 지식을 제공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숫자야구 게임으로 나의 감각세포를 깨우면서 두 지식이 상충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으로 남겨둔다면 어렴풋하기만 한 법이다. 숫자야구 게임에서도 중급 이상의 단계에서는 메모를 해두어야 정답에 다다를 수 있듯,오늘은 뇌과학에 대해 쓰기로 한다.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고 적자생존 아니겠나?


 먼저 질 볼트 테일러가 쓴 '나를 알고 싶을 때 뇌과학을 공부합니다.'라는 도서를 보자. 이 책에서는 뇌졸중을 겪은 뇌과학자가 자신을 임상 대상으로 삼아 멈춘 뇌의 부분이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알아본다. 일종의 소거법이다.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각각의 캐릭터를 부여하여 픽사 애니메이션인 인사이드 아웃을 연상시킨다. 좌뇌가 손상된 뒤에 우뇌만으로 생활했던 저자에게 뇌를 회복한다는 것은 곧 삶을 회복하는 것과 같았다. 자신의 일상을 에세이식으로 소개하기도 하고, 각 뇌의 역할을 토대로 모든 자신을 인정하자는 자기 계발 서적 같은 교훈도 준다.


 반면 데이비드 이글먼이 쓴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라는 도서를 보자. 뇌의 반쪽을 절제하고도 일상을 영위하는 매슈라는 아이를 소개하며 시작한다. 잃어버린 감각을 복구하는 기술이나,손끝에 자기장 칩을 심어 새로운 감각을 깨우는 기술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아직 미지의 영역인 뇌에 대해 설명한다. 시각장애인의 사례를 많이 들어 주기도 한다. 전기 신호를 직접 뇌에 전달하여 시각세포를 자극하는 신기술을 소개하거나 시각을 담당하던 뇌세포가 점자를 더듬거릴 때 활성화된다는 것에 주목한다. 요는 뇌의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질은 뇌졸중을 경험하며 뇌의 각 부분이 담당하고 있는 역할에 집중한다. 반면 데이비드는 뇌의 특정한 부분이 자신의 역할을 잃으면 또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단다. 환상통을 설명해 보자 오른팔을 잃은 이들이 손바닥의 간지러움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질이라면 손바닥을 담당하는 뇌의 감각피질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고, 데이비드라면 새로운 역할이 부여된 감각피질이 전혀 다른 부위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는 틀렸다는 말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맞다. 지금까지 살면서 숫자야구라는 게임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었다. 하지만 우연히 발견한 이 게임에 다시금 승부욕을 불태우며 루미큐브에 열중하던 뇌세포가 살아나는 기분이다. 퍼즐게임에 맞았던 취향으로 숫자야구에 익숙해지듯 스트라이크와 볼 개수를 해석하는 데에 들였던 시간이 줄어간다. 그 누구도 도로 위에서 신호등을 보고 '파란 배경에 검은 기계에서 동그랗고 붉은빛을 내고 있다.' 따위의 인식을 의식적으로 거치지 않는다. 감각을 해석하여 감정이 되지만 그러한 알고리즘은 나의 몸과 뇌에 달려 있다. 두 뇌과학자의 설명은 순서, 혹은 시점의 차이일 뿐이다. 나를 알고 싶을 때 뇌과학을 공부하고 나면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


 인간은 여럿으로 태어나 하나로 죽는다고 한다. 소개했던 두 훌륭한 도서 중 비교적 내 마음에 더 들었던 책의 첫 머리에 나왔던 하이데거의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어린아이가 모두 죽음밖에 남지 않은 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해석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삶이란 또 다른 나의 죽음이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게임을 즐기는 내가 죽지 않도록 아끼고 싶다. 한동안 숫자야구라는 게임이 그러한 나의 소망을 지켜주리라고 믿는다. 오늘 밤에도 게임 한 판 클리어하여 도파민으 로 샤워를 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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