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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성 경청꾼 May 05. 2023

당신의 익숙함이 나의 파라다이스

<서울 여행(4. 29. ~ 5. 1.)을 마치고>

 어린 시절 가을이면 학교 가는 시골길에 관광버스가 꼬리를 물었다. 내겐 익숙한 풍경을 보려는 외지인들로 붐빈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가을 소풍은 늘 나름 영산으로 유명한 학교 뒷산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이곳이 뭐가 그리 대단한지 의문이 들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고 하지만 너무 가까이 있으면 그것을 아예 보지 않게 된다. 누구보다 매력적인 배우자를 두고도 바람을 피우는 인간들을 보라. 나이가 들면서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언가 새롭게 기억할 일이 없어서다. 결국 다 같은 말이다. 익숙함은 소중한 줄 모른다.

지난 주말, 서울 여행을 다녀왔다. 그곳에 사는 천만 명 역시 과거의 나처럼 서울과 여행이라는 단어를 함께 묶는 것이 의아하리라. 하지만 2박 3일간의 여행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첫날은 인디 페스티벌로, 둘째 날은 동대문 완구 시장과 경복궁으로, 마지막 날은 청와대와 광화문을 돌았다. 당초 계획과는 다소 다른 일정임에도 알찼다. 오늘은 굳이 기록해 두어야만 기억에 오래 남을, 그럼에도 오래도록 버리고 싶지 않은 장면들을 기록해두고자 한다.


 페스티벌에 동행해 주셨던 지인과 직접 뵙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편했다. 아니 편하게 만들어주셨다. 아몬드 빼빼로와 선크림, 혼자 마실 물이 담긴 텀블러  정도만 준비한 나와는 달랐다. 돗자리와 샌드위치, 하루 견과 한 봉에 블렌딩된 차가 담긴 보온병, 무릎담요까지 준비해 오신 덕에 봄비 내리는 페스티벌이 낭만적일 수 있었다. 오가는 대화도, 저녁 메뉴의 선정도 탁월한 한편 무엇보다 함께 걷는 걸음이 편했다. 10시가 넘어 십센치의 공연까지 끝나고 3~4000명이 북적이는 내리막길을 걸을 때였다. 잠시 작년 10월 있었던 참사 소식에 대한 악몽과 부딪혔지만 덕분에 휘청거리지 않을 수 있었다. 숨겨야 할 속마음이지만 살아서 다행이었다. 축제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기나긴 줄에 서서 들었던 얼굴도 모를 분이 다쳤다는 소식이  떠오른다. 앰뷸런스까지 부르니 마니 했던 그분의 쾌유를 빈다.


 그날 밤 12시가 가까운 시간에 가족이 예약한 에어비엔비에 도착했다. 신발을 벗기 전까지는 그리 넓지 않을 공간에 나까지 끼기에는 무리가 아닐까 싶었다. 다행히 일곱 살, 여덟 살 공주님들이 나와 같은 침대에서 자기를 바라주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비에 살짝 젖은 내 품에 안기는 아이들을 위해 서둘러 씻었다. 잘 시간을 항참 넘긴 두 아이들 모두 얇디얇은 내 팔을 베고 싶어 했다. 쓰잘 데 없는 나의 손이 이런 용도일 줄이야. 내가 가장 오른편에 누웠기에 하나는 어깨에 가까운 위팔을, 하나는 팔꿈치에 가까운 팔뚝을 베도록 했다. 왼 손에 주먹이 쥐어지지 않았기에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아이들의 나긋나긋한 숨소리를 듣고 나서 팔베개를 풀어야만 했지만 조금 더 버텨볼 걸 하는 후회는 여전히 왼쪽 팔이 저릿하게 남는다.


 다행히 월요일은 날씨가 좋았다. 전 날까지도 추운 봄비가 내렸던 것이 무색하게도 한낮에 웃옷 없이 아이스 카페라테를 홀짝거리기에 최적의 날씨였다. 어느덧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첫 조카는 광화문 분수에 홀딱 젖으며 웃기까지 했다. 전날까지 하루에 만 오천 보씩 걸었다는 사실 역시 개의치 않았다. 특히 올해 6월 첫돌을 맞이하는 조카가 목마를 탈 정도로 제 몸을 가눌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목마를 태워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알겠지만 웬만큼 허리와 목을 펼 힘이 없다면 불가능할 자세다. 광화문을 두리번거리는 고갯짓도, 쇄골을 때리는 뒤꿈치도, 귀를 꼬집어대는 매운 손마저 뭉클했다. 첫 조카를 안았을 때의 감격스러운 감정이 복받쳐 오르려다가 당사자의 까무러치는 웃음소리가 저 앞에서 들려왔다. 그래, 이 아이도 언젠가 물에 홀딱 젖어 깔깔거리는 장난꾸러기가 될 날이 오겠지.


 인맥이 넓지 않은 내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던 사람과 페스티벌을 관람한다. 결혼도 하지 않은 내가 네 명의 아이들의 성장을 실감한다. 평소 편애하던 서진이라는 작가가 쓴 '파라다이스의 가격'이라는 여행서에서 파라다이스는 마음속에 있음을 믿지 않는다는 결론에 공감하지 않았다. 실존하는 파라다이스를 위해 비싼 값을 지불하는 것보다 마음속의 파라다이스를 찾는 게 그럴 수만 있다면 더 경제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지출이 만족에 영향을 준다는 것도 안다. 시간과 체력 같은 것조차 쓰는 만큼 즐거울 마음가짐이 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가 없이 행복하려는 노력이 도둑놈 심보일지도 모르겠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말씀하셨듯 '돈은 쓰려고 버는 거다.‘ 누군가와 비슷한 수준이 아닌 나만의 파라다이스가 익숙함이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은 집을 나가봐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지겨운 일상을 버티는 것 역시 낯섦을 위한 지출이라는 정도로 지금의 달뜬 마음을 진정시켜 보자. 당신에게는 익숙할 그 무엇을 위해 나는 시간과 체력과 돈을 지불한다. 낭비로 보일 지금이 여기 아닌 어딘가 낯선 곳에 데려다 주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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