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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성 경청꾼 May 26. 2023

사랑하지 않습니다, 고객님.

<영화 다음 소희(정주리)를 보고>

 콜센터에 연락하는 일은 불쾌한 경험이다. 애초에 혼자서 잘 해결했다면 홈페이지 맨 끝단에 나와 있는 고객센터 전화번호를 찾아 기나긴 통화연결음을 듣고, 느릿느릿 안내하는 음성에 따라 키 패드를 누른 뒤에 이름 모를 누군가와 통화할 일도 없다. 최근에는 챗봇이 활성화되어 편해지기는 했다지만 그마저 음성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손바닥에 참을 인(忍) 세 번이라도 적고 통화 버튼을 눌러야 한다. 만약 의도가 서비스의 해지라면?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여기, 춤을 좋아하는 고등학교 실습생이 있다. 이름은 소희, 그녀는 대기업 통신사... 하청의 하청의 하청인 콜센터에 해지방어팀으로 입사한다. 친구들은 축하해 주고 선생님은 600명 넘는 대기업을 뚫었다며 뿌듯해한다. 누구보다 기쁜 건 소희다. ‘나 이제 사무직 여직원이다~’ 영화를 통틀어 그녀의 목소리가 가장 기분 좋다. 하지만 실적 1등까지 했던 소희는 회사에서 징계를 받고 저수지에 몸을 던진다. 그녀가 죽은 이유는 무엇일까? 댄스학원에서 잠시 마주쳤던 형사 유진에게 사건이 배당된다. 자살 정황이 확실한 사건에 유진은 무리한 수사라는 기사가 날 정도로 파고든다.


 지금까지가 예고편에도 등장했던 다음 소희의 줄거리다. 평소 좋아하던 영화 유튜버가 이 영화를 소개하며 흥분하던 모습이 인상 깊었다. 한국의 켄 로치랄 정도인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란 영화를 감명 깊게 봤기에 그의 비유에 맘이 흔들렸다. 마침 화면 해설이 제공되는 애플리케이션에 이 영화가 개시되어 그날 밤, 방울토마토를 팝콘 대신으로 삼았다. 그 덕분에 좋은 영화 한 편 관람했으니 영화 유튜버의 오마주 한번 해보자. ‘지금부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감상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영화는 소희가 춤을 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같은 부분에서 자꾸 넘어지는 소희는 남자 친구 태준과 함께 춤을 맞출 때에도 그 동작만큼은 실패한다. 그녀가 유서 하나 없이 저수지에 빠지기 전, 비워버린 스마트폰에서 차마 지울 수 없던 영상은 계속 실패하던 그 춤 동작이 성공하는 장면이었다. 형사 역을 많이 맡던 배두나가 작품 속에서 오열한 적이 있던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소희가 남긴 무언의 유언을 보며 유진은 울컥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몰입했다면 다음 소희가 유진일지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하게 된다.


 죽은 자식이 사용하던 인터넷을 해지하려는 아버지의 전화에도 통화시간을 질질 끌어야 한다. 동기 실습생에게 실적 1등을 한 노하우를 전수해 주던 소희는 회식 자리에서 다른 실습생과 드잡이질을 한다. 누구를 탓하랴? 당장 이번 달에 인센티브를 받지도 못할 텐데 실습생들은 실적에 목을 멜 수밖에 없다. 통신사는 다른 회사와 가입자로 경쟁하고, 학교는 취업률로 다른 학교와 경쟁한다. 교육청은 다른 지역 교육청과 경쟁하고, 실습생에게 강요되는 이중 계약은 고용노동부의 소관인지 교육부의 소관인지도 불투명하다. 이 사회가 악이라고 욕하기 엔 나부터 성과급은 많이 받고 싶고, 옆 사람과의 업무 구별이 철저하기를 바란다.


 소희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에 주변 사람들에게 수많은 신호를 보낸다. 선생님에게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을 때, 부모님에게 회사를 그만두면 안 되냐고 물을 때 그들은 소희가 한 말의 의미를 모른 체한다. 어쩌면 정말 모른다. 아버지는 소희가 죽고 나서야 그녀가 받았던 월급내역을 따져보고, 어머니는 소희가 춤을 좋아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유가족을 탓한다면 다음 차례는 당신이라며 등을 떠미는 짓이다. 그가 지금 낭떠러지 앞에 있는지 경주선 위에 있는지 정도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인사말이 사방에서 들려올 때 차라리 귀를 막아버리는 소희에게 사랑은 사치다. 행복은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목적이 없는 춤사위가 계속되기 위한 답은 간단하다.


 영화를 보던 중간중간 지인이 카톡으로 말을 걸어왔다. 조금 우울해 하나 보네. 늦게나마 대답을 하며 대화를 이어가다가 대수롭지 않게 영화를 보는 데에 집중하였다. 그러다 보니 답장을 미루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영화가 끝난 뒤에야 밀린 카톡을 보는데 시차를 가지고 온 7개의 짧은 톡 중 ‘속상하다.’라는 말이 둘이나 있었다. 많이 우울한가? 전화를 걸어서 ‘뭐가 그리 속상해?’라고 농담처럼 말을 거니 지인과 알고 나서 처음으로 내 앞에서 훌쩍거린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을 살 그 역시 사무치도록 마음이 아플 때가 있었던 모양이다.


 끝내 지인이 나의 농담에 피식거릴 때까지 전화를 질질 끌었다. 영화 속에 나오는 전화응대 요령을 체득한 덕일까? 전화를 끊고 나니 지인도 나도 다음 소희가 되기에 충분한 것만 같아 울적해졌다. 요즘 공감의 배신이라는 책을 읽고 공감에 부정적인 면에 집중했었다. 이 책은 공적인 영역에서 공감을 자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공적인 부분의 공감은 상대를 적대시하는 정책을 만들어 형평성에는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적인 영역에서도 공감하는 일은 좋을 게 없었다. 세상에 긍정에 공감할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공감이란 상대에 나를 투영하여 물들도록 만든다. 그럼에도 공감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는 결국 사람밖에 없다.


 오늘은 영화 속의 개연성을 더해주는 설정을 상상해 보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유진이 소희의 사건에 더욱 집중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다. 유진은 조리사셨던 어머니께서 폐암에 걸리자 그녀의 항암치료를 돌보고 산업재해를 인정받기 위해 가족 돌봄 휴직을 낸다. 하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산재는 인정받지 못한다. 휴직의 사유가 중단되어 복직을 하기 전날, 어머니가 쓰시던 스마트폰을 해지하려 시도하지만 쉽지 않다. 이윽고 피곤에 쩐 채 인사하는 콜센터 직원에게 목소리를 높이지만 전화를 끊고 나니 작은 후회가 남는다. 복직하여 처음 맡게 된 사건은 자살 사건이다. 실적을 올리고 종결해도 되었을 사건이 산재로 보인 이유는 소희의 책상 모니터에 덕지덕지 붙은 포스트잇이다. 수많은 메모 사이에 쓰여있던 엄마의 이름을 본 순간 유진의 뇌리에 앳되기도, 갈라지기도 한 목소리가 스친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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