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게, 푸르르게.
<덕수궁 일원을 산책하고>
석가탄신일을 낀 지난 연휴가 유난히 길었다. 5일간 쉬었기 때문이다. 목요일에는 지역의 시각장애인 체육대회에 참여하고, 금요일에는 서울에 다녀왔다. 토요일에는 수 년 만에 거금 6만 원짜리 염색을 하고 멀리서 온 가족들을 맞았다. 일요일에 있을 막내 조카의 돌잔치를 위함이었다. 맛이 좋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진행한 돌잔치는 온 가족이 모여 술 없이도 거나했다. 월요일에는 오롯이 혼자가 되었다. 다섯 시간 동안 낮잠도 자고, 밀린 운동을 하며 연휴를 마무리했다. 진정 5월은 푸르구나. 하지만 이제 곧 더욱 알찬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시력이 흐려지고 처음으로 비행기를 탄다.
6월 8일부터 이틀간 제주여행을 하기로 했다. 한 안과에서 시각장애인 단체에 목돈을 기부했다. 기부금을 받은 단체는 시각장애인 다섯 명과 비장애인 다섯 명을 모았다. 시각장애인에게는 여행의 기회를, 비장애인에게는 시각장애인과 함께하는 경험을 선물하기로 한 것이다. 시각을 제외한 온 감각을 활용한 여행에 시 낭송을 곁들인다는 취지는 나로 하여금 구미가 당기도록 했다. 신청을 위한 걸림돌이라면 나의 목소리로 시 한 편을 음성사서함에 녹음해야 한다는 민망함이었다. 삐삐를 사용한 적 없던 그놈의 MZ 세대로서 이마저 새로웠다. 나는 몇 없는 레퍼토리 중 오준석의 논어라는 피아노곡을 연주하며 윤동주 시인의 소년을 낭송했다.
며칠 뒤 여행 대상자에 선정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여행을 담당하시는 선생님께서는 신청자 중 유일하게 배경음악을 삽입한 만큼 절실함이 묻어났다며 웃으셨다. 제주도에 가기 전에 한번 모이고자 하는데 괜찮겠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솔직히 휴가가 아까웠다. 하지만 안 가기에도 아쉬웠으니 직접 일정을 알차게 만들기로 했다. 서울로 거주지를 옮기며 못 보게 된 지인에게 용기를 내어 연락했다. 오랜만에 뵐 수 있겠냐고 여쭤보니 다행히 지인분께서도 나의 제안을 반겨주셨다. 그제야 휴가를 신청하는 일이 아깝지 않았다. 제주여행 일행과는 덕수궁 앞에서 금요일 오후 두시에 만나기로 했다. 일찍 서울에 도착해 오랜만에 지인과 만나 이른 점심을 먹고 카페에 들른다면? 완벽한 계획이었다.
오전 10시 반이 채 안 되어 지인과 용산역 카카오 팝업 스토어에서 만났다. 먹기로 한 식당의 오픈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아이파크몰 근처를 배회하고 자리 잡은 벤치에 앉아서도 끊이지 않던 대화는 오래도록 만나지 못했던 시간을 지워주었다. 정신을 차리고 그나마 가까이에 있는 식당에 앉았다. 하지만 튀김옷에 새우껍질 식감을 더한 크림새우를 씹으며 그 맛의 황홀경에 다시금 정신을 놓아야만 했다. 밀린 이야기 탓에 미리 알아두었던 카페를 들를 시간이 촉박했다. 감사하게도 다음 약속 장소까지 동행해 주시던 지인분과 함께 시청역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 카페 역시 붐비기는 마찬가지였다.
비가 온다던 일기예보와는 달리 하늘이 푸르르니 돌담길 근처를 산책하는 것이 어떨는지? 나는 기쁜 마음으로 지인의 팔꿈치를 잡고 함께 걸었다. 돌담길 너머까지 자란 나무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산들거렸고, 이화여고와 창덕여중 근처에서 들려오는 학생들의 수다가 소란했다. 근처에 있는 줄도 몰랐던 주한영국대사관의 낯섦이 향기로워 근처를 맴돌다가 돌담의 스치는 손끝이 볕을 잊을 정도로 서늘하여 쓰다듬었다. 종아리가 땅길 즈음 되니 어느덧 해가 중천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나의 다음 약속 장소에서 언제인지 모를 우리의 다음을 기약했다.
제주도에 갈 일행 총 13명 중 11명이 모였다. 해당 사업을 기획한 단체의 홍보 방송 진행자께서 이번 친목모임을 녹음해 주시는 한편, 아나운서 분께서 현장 해설을 곁들여주셨다. 덕수궁 안을 고즈넉이 걸으면서 나의 비장애인 파트너 분께서 그날 오전에 '어둠 속의 대화'에 참여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각장애인의 일상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인 '어둠 속의 대화'는 1988년 독일에서 시작된 나름 유서 깊은 프로젝트다.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씨가 감사했다.
괜한 웃음이 멈추지 않았던 이유는 산책의 즐거움 탓만은 아니었다. '고종황제가 자주 가베를 즐겨 드셨던 장소는 어디일까?'라는 질문에 다리를 쩍 벌린 채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를 지르던 노랑머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선했다. 아나운서 분께서 이지적인 목소리로 정관헌에 대해 설명해 주실 때 나는 홀로 무한도전의 궁 밀리어네어 특집이 떠올라 피식거려야만 했다. 한편 중화전 앞에서 임금이 지나던 어도를 넘으면서는 사도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발걸음을 늦추었다. 영조(송강호 역)가 자결하라는 명을 내리자 머리에 피가 날 정도로 바닥에 머리를 찧던 사도(유아인 역)의 넋 나간 표정이 나를 붙들었다. 그토록 발걸음을 달뜨게도, 묵직하게도 만들었던 덕수궁 산책은 기어코 다다른 카페테라스에서 제주 여행 일정을 들으며 마무리되었다. 블루베리에이드가 상큼했다.
요즘 논어를 읽고 있다. 독음을 밝히고, 이를 번역한 뒤에 작가가 직접 해설한 글을 읽다 보면 오두막에서 글을 썼다던 작가와 수천 년 전에 살던 공자가 나누는 대화를 엿듣는 기분이다. 특히 '세월이 추워져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라는 구절은 해설에서 몇 번 더 등장하여 외우기가 쉬웠다. 온 세상이 앙상한 나뭇가지와 하얀 눈으로 뒤덮였을 때에야 푸르름을 잃지 않는 이의 절개를 안다. 제주여행을 신청할 때 낭독했던 윤동주의 소년은 단풍잎처럼 떨어진 가을, 즉 시린 겨울에 나에게로 묻어나는 파란 물감을 그리고 있다. 공자와 윤동주가 이렇게 통한다. 더군다나 지금은 여름이다. 사방이 어두워 이불 속에서 뒹굴거리기만 했던 겨울이 아닌 만큼 세상은 오롯이 푸르리라.
곧 푸른 밤이 온다. 제주도의 푸른 밤 말이다. 그 하늘 아래로 가기 위해 찾았던 덕수궁 산책도 추억 속에서 푸르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