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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성 경청꾼 Jun 09. 2023

사랑할 자격

<옷소매 붉은 끝동(강미강) 오디오북을 듣고>

 "상당히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장애인인 저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죄책감이 들기도 했어요. 그녀에게는 익숙지 않을 저의 불편을 나누고 싶지 않아서요. 하지만 그럼에도 저를 선택해 줄 누군가가 있다면 평생 사랑할 자신이 있습니다. 영상 덕에 굳이 일기장에 적을 생각을 공개해 보네요. 패배주의인지 정신승리인지 모르겠지만 인생에 중요할 생각을 들여다볼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

평소에는 영상을 보며 좋아요 누르는 것도 귀찮아하던 내가 한 달 전 정도에 올라온 영상에 달았던 댓글이다. 시각장애인 유튜버 중 가장 구독자가 많은 이가 결혼을 앞둔 장애인에게 찾아가서 조언을 받는 콘텐츠를 올렸다. 결혼을 하고 싶다고 당당히 밝히는 유튜버에게 일말의 감화를 받아서일까? 써놓고도 오글거리나 싶었지만 감사한 마음이 일었다. 영상의 답글 중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은 나의 답글에 달린 대댓글에는 위로와 응원이 가득했다. 그러나 차마 반응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길 댓글이 하나 있었다. 좋은 말보다는 나쁜 말에 감정이 더 심히 동하나 보다.


 "이게 맞지. 장애인들한테는 연애도 사치다. “


 연애가 사치라는 말보다 '이게 맞지'라는 말에 울컥했다. 사람을 분노케 하는 것은 나와 반대될 때보다 나의 의도가 전달되지 않을 때임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나와 정반대라는 사실은 마음이 끌리는 이유가 되지만 아무리 커다란 마음을 주어도 그 마음을 받을 수 없다면 사랑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하리라. 조선 시대의 어느 왕과 궁녀 사이처럼 말이다. 자신의 선택 없이 임금이 되어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던 남자가 있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궁인이 되어 멋대로 살지 못한 여자가 있었다. 정조와 의빈성씨의 로맨스를 그리고 있는 '옷소매 붉은 끝동'이라는 소설은 드라마로 유명했지만 나는 그저 로맨스 사극으로만 알고 있었다. 지난 일요일 시간을 죽일 요량으로 오디오북 앱을 열어보니 어디선가 들어본 인기 검색어에 오른 제목에 궁금증이 일었다. 판도라의 상자였다. 가족들과 함께 있던 징검다리 연휴까지도 골전도 이어폰을 귀에서 떼지 못했다.


 2권으로 나뉜 이 소설을 오디오북으로 접한 것은 행운이었다. 얼마 전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개소리와 노세 소리를 내던 정민혁 성우의 비글미 넘치는 이미지를 다시금 그의 목소리와 어울리는 이미지로 되돌릴 수 있었다. 는 사실은 둘째치고 어렸을 적부터 나이가 들 때까지 일생을 그리는 소설의 특성상 성우들이 직접 나이대별로 목소리를 달리 내어 만족스러웠다. 특히 1권에서 내내 맹한 모습을 보였던 영희가 2권에서는 죽음도 불사할 사랑에 희생할 때, 그리고 외전 속 일장춘몽에서 친구들보다 고생하여 훨씬 먼저 세월을 맞은 채로 재회할 때 청자에게 그녀의 일생이 같은 성문으로 안긴다.


 내가 역사적 지식이 낮다는 사실도,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어떠한 사전 지식도 없었다는 사실도 다행이었다. 덕분에 1권에서 홍덕 무감 제 꿈에 취해갈 때 임금이 어떻게 파훼할지 노심초사하는 한편 덕임과 함께 임금의 아비에 대해 오롯이 궁금해할 수 있었다. 소설이 꽤 진행되고 덕임이가 완풍군의 집에서 기거할 때에야 '혹시 이 소설의 남주는 정조인가?‘라고 어렴풋이 의심해 볼 정도였다. 애초에 사극 판타지 정도로 생각했던 나였기에 덕임이가 실존 인물이라는 사실도 믿지 못했다. 하지만 정조가 의빈성씨에게 자신을 모시던 여인들 중 유일하게 어제 비를 내렸다는 사실과 소설 중간중간 등장하는 '곽장양문록'의 실체를 찾아보고 나서야 정조의 지극함을 인정할 수 있었다.


 로맨스 소설을 읽을 때마다 괜스레 반발하고 싶은 것은 나와는 다른 이상적인 남성상에 대한 질투심이다. 여성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를 문제 삼는 것보다는 하찮겠지만 여성의 시각에서 묘사되는 남정네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완벽하면 완벽한 대로 일종의 불편한 골짜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이 작품만큼은 반발의 여지가 없다. 성덕임이란 이름을 가진 한 여자가 임금을 사랑했는지는 소설 속에서도 확언하지 않는다. 훌륭한 임금이었기에 훌륭한 남자가 될 수 없었던 이산과, 천한 궁인 신분이었기에 천한 여자가 되지 않기를 소망한 성덕임,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는 그녀가 친구들과 함께인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물론 사랑의 목적이 행복은 아니다. 적어도 남자로서의 이산은 임금으로서의 그만큼 속이 넓지 않다. 그녀의 사랑을 탕평하기엔 그는 그녀를 너무도 사랑했던 것이다.


 사랑은 노력이고 타이밍이라고 생각해 왔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럴 만한 마음가짐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지인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이러한 생각이 스스로의 마음을 중시하는 태도로 비화되어 상대방을 상처 입힐 수도 있지 않겠냐는 핀잔을 들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말이 맞았다. 결혼할 상대를 찾고 짝사랑할 누군가라도 물색한다. 한창 혼자가 힘겨울 때는 호구가 될 사람이 필요하다고 투정도 부렸다. 열정을 쏟을 누군가를 그린다는 건 사랑을 받을 상대에게 불행할 일일지도 모른다. 성왕도 아니고 이 시대에 궁녀라 함은 시대착오적이온데 무얼 바라겠나이까?


 법정스님의 책 제목처럼 스스로 행복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체념하거나 포기한 건 아니다. 내가 선택한 행복한 삶을 살다가 나를 선택할 이의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처음 먹어보는 밀감 따위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주고, 죽은 나무에서 핀 노란 꽃의 보드라움을 느낀다면 좋겠다. 영원을 약속하지 않고도 가능한 오래도록 함께 행복하길 바란다면 언제나 충만한 마음에서 마땅히 사랑할 만한 그 사람과의 순간이 곧 영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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