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로 찰칵!
<제주여행(6.8~6.9.)을 마치고 (상)
새벽 여섯 시가 안 된 시각에 아파트 현관을 나섰다. 예상대로라면 다섯 시간 뒤에 제주도에 도착할 것이었다. 활동 지원 이모의 차를 타고 KTX 역에 도착하여 당직을 서고 계신 코레일 직원분의 안내 보행을 받아 목적지를 향했다. 늦지 않게 김포공항 역에 도착했지만 플랫폼까지는 역사 직원의 안내 보행이 어렵다고 했다. 파트너 분께 연락을 드려 잠시 내려와 주십사 부탁을 드렸다. 1박 2일 동안 나와 함께할 파트너 분과는 지난 덕수궁 산책 후에 2주 만의 재회였다. 모임 장소에 도착하니 비행기보다 먼저 들떠있는 발걸음과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여행을 함께할 일행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파트너 분의 팔꿈치를 다시 잡았다. 공항 수속을 마친 뒤 비행기 좌석에 앉았다. 운이 좋게도 창문 자리였다.
성층권의 햇빛을 허벅지로 느끼며 살얼음이 동동 뜬 옥수수수염차를 즐겼다. 착륙을 아쉬워하며 제주공항에 도착하니 수십 년간 성 고정관념과 맞서고 계신 버스기사분께서 우리를 반기셨다. 기사분께서는 도로를 달리는 시간에 마이크를 들고 가이드 역할까지 훌륭히 소화해 주셨다.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관계라든가 방언처럼 현지인만이 할 수 있을 양념을 쳐 쥬신 덕에 이동 시간이 심심하지 않았다.
겨울엔 동백이, 여름엔 수국이 예쁘다던 카멜리아힐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고사리 튀김 냉모밀과 흑돼지 덮밥 중에서 결정 장애를 겪고 있자 파트너 분께서 하나씩 시켜서 나눠 먹자고 말씀해 주셨다. 테이블당 모둠튀김도 시켜주신 모양이었다. 두 번 밖에 뵙지 못한 분들 앞에서의 내숭은 그 모든 음식의 맛 앞에서 뼈도 못 추렸다. 나는 살이 찐다는 속설도 잊고 공용 음식의 마지막 조각인 한치 튀김까지 삼키고 나서 산책로를 향했다. 카멜리아힐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동백은 진 채였다. 대신 수국이 가득했다. 수국은 색색마다 꽃말이 다르다던데 같은 색깔이라도 촉감이 전혀 달랐다. 수국에 코를 가져다 대어봤자 향은 없었다. 대신 파트너 분의 조심스레 손을 이끌어주시면 손끝으로 꽃잎을 느끼다가 중지와 약지 사이에 줄기를 끼워 조심스레 수국을 감싸보았다. 손바닥 안에서 꽃잎이 제 손가락으로 글자를 적어 인사하는 기분이었다. 간지러운 손바닥에 향긋한 추억이 담겼다.
잊지 말자. 본 여행의 취지는 동행 낭독 여행이다. 카페 자리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며 비장애인 분들께서 낭독하는 시를 들었다. 내게 여행 대상자에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주셨던 분께서 내가 태어나기 30년 전에 발간된 김소월의 시집을 가지고 오셨다. 아무리 책을 좋아한다고 해도 요즘에는 실물 책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더군다나 1960년 대의 책이라니. 옛날 책에서 나는 냄새가 시구절이 되어 콧속을 간질였다. 한편 나의 파트너 분이 읽으신 비행기라는 시는 낭독하는 이와 어울렸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자제분이 계신 분께 실례되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귀여운 시의 내용이 입꼬리를 띄웠다. 그리고 잊어버렸었다. 다음 날에는 나 역시 사람들 앞에서 낭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걱정할 시간이 없었다. 다음은 감귤 박물관으로 향해야 했다. 이번 일정은 체험활동으로 이루어졌다. 감귤쿠키에 틀을 내어 오븐에 굽는 동안 감귤 피자를 만들고, 감귤 피자가 오븐 안에서 구워지는 동안 감귤박물관을 산책하는 일정이었다. 시각장애인 둘과 비장애인 둘, 4명에 한 테이블씩 모인 멤버 운이 좋았다. 다름 아닌 멤버 중 시각장애인 분께서 비건이셔기 때문이었다. 내게 햄과 새우, 치즈 등의 피자 토핑을 몰아주신 것이다. 덕분에 나와 그분께서 빚은 피자는 무게부터 맛까지 현저히 달랐다. 깜짝 놀랐던 건 생각보다 감귤 잼과 토마토소스, 몇몇 채소들이 간헐적으로 있는 비건식 피자가 또 그렇게 맛있더란 말이다.
쿠키와 피자로 인해 배가 아직 안 꺼졌음에도 어느덧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평소 식당에서 고르지 않을 생선구이와 조림을 푸짐한 밑반찬과 함께 비워갔다. 나 자신이 질리도록 음식이 잘 들어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던데 제주도는 '식식식'이었다. 배 터지도록 먹고 올라 시장을 돌아다니니 오늘 처음으로 카드를 쓸 일이 생겼다. 온라인 쇼핑몰로 미리 제주도 초콜릿을 사놓아서 짐을 불릴 필요는 없었지만 방앗간 앞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감귤칩과 우도 찰떡 파이로 지름신을 잠재운 뒤 법환포구 근처의 숙소에서 짐을 풀었다.
피곤했지만 이대로 잠들기에는 아쉬웠다. 숙소 앞의 7번 올레길에 밤산책을 나설 파티원을 구한다는 소식에 조건반사처럼 손이 올라갔다. 다행히도 막상 걷기보다는 편의점 옥상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처음 먹어보는 제주예거와 가장 흔한 과자지만 너무도 오랜만이었던 매운 새우깡의 조화가 환상적이었다. 수개월 만에 들어가는 알코올에 간도 기쁜 듯이 날뛰었다. 한 캔을 다 비우지도 못하고 볼에서 열이 났다. 술이 취하려고 마시는 거라면 나라는 인간은 갸륵하게도 참 경제적이었다.
여행 중에 파트너 분께서 사진을 많이 찍어주셨다. 시각장애인 단체에서 온 담당자분께서는 단체 홍보 오디오 프로그램의 소스를 따시더니 얼마 전에 해당 프로그램이 업로드되었다. 영상팀도 있었다. 그 결과는 다음 달에 화면 해설과 함께 게시된다고 한다. 나는 활자로 남기련다. 오늘은 특별히 하루를 오롯이 담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1000만 화소짜리 사진 수십 장 보다, 전문가가 편집한 음성이나 영상보다 3000자가 채 되지 않을 활자에 작은 추억을 담는다. 다른 누가 아닌 나를 위해 가장 경제적인 기록이다. 언젠가 다시금 열어볼 사진첩이 될 장면들을 이곳에 꽂아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