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생일이 다가온다. 그리고 스티븐의 '생일맞이 직접 공사' 가 또 시작됐다. 작년에 가스레인지 사건을 이미 잊어버린 건가. 하지만 작년과 같은 의욕적인 모습으로 이미 집 뒤편 벽을 허물어버린 후였다. 물론 그 동안 뒷마당과 집 사이에 벽이 단절된 느낌을 줘서 답답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부서진 모습을 보니 '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라는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다.
' 왜 늘 스티븐이 직접 집을 고치나요? 사람을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라고 하는 사람도 물론 있으시겠지만 물론 나도 한국이었다면 하루 이틀이면 뚝딱해 주실 전문가를 부르는 걸 적극적으로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호주는 일단 인건비가 엄청나게 비싸고, 그렇게 전문가를 불러도 일 처리가 놀라울 만큼 느리다. 성질 급하지 않아도 '내가 하는 게 낫겠다.' 싶어질 만큼이니 늘 스티븐이 나서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이것이 모든 고난의 시작이었다.
" 난 발리로 여행을 갈 거야."
"무슨 말이야? 지금 여행을 간다고? 이 상황에?"
조슈아는 정말 갑자기 통보를 해버렸다. 행복이의 생일이 코앞이고, 온 집안이 공사 때문에 난장판인데다 스티븐 혼자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도와주기는커녕 느닷없이 상의도 없었던 발리 여행을 간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순간 너무 화가 나서 조슈아에게 소리를 질러버렸다.
“사람들은 결과만을 보고 그 결과가 모든 과정을 설명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관계란 아주 작은 과정들이 모이고 흩어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변하기도 한다. 나와 조슈아의 관계가 그랬다. 9년. 우리가 함께 살며 보냈던 시간은 길었고 그만큼 어떤 한 두 가지 감정으로 설명하기엔 복잡했다. 하지만 어느 날 아무도 예상치 못한 기로에서 방향이 바뀌었다.”
내가 처음 조슈아를 만났을 때 그는 만 12살로 다른 남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임이랑 카메라 등 나도 좋아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우리는 꽤 잘 맞는 친구처럼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스티븐이 처음 조슈아와 같이 살자고 할 때도 흔쾌히 승낙 했었다. 그런데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조슈아는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거나 할 때 내가 있으면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고 그래서 나는 조슈아의 친구들이 놀러 오거나 생일 파티 등 행사가 열릴 때마다 밖에 나가 있었다.
매일 친구들이 놀러 오는 것도 아니었고 생일 파티는 일 년에 한 번 있는 조슈아에게 중요한 날이니 사춘기의 예민한 감성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날 말고는 평소엔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굳이 수면 위로 떠올려버리면 내가 너무 큰 상처를 받을 것 같아 어쩌면 내내 모른 척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면서 내 안에는 아주 작은 상처들이 점점 쌓여가고 있었건 걸까?...’
조슈아가 18살이던 해의 어느 날이었다.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을 지나가는데 조슈아가 보였다. 조슈아는 친구들과 함께 있었는데 나는 조슈아를 보고 당연히 " 안녕~" 이라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조슈아가 그냥 무시하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시끄러워서 목소리가 안들렸나?' 라는 생각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했다. 그런데 조슈아가 모르는 척 트램에 올라타버린 것이다.
' 아. 못들은 게 아니었구나.'
나는 순간 깨달아버렸다. 일부러 나를 못 본척하고 있다는 걸. 조슈아는 친구들에게 나를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걸 깨달은 순간 내 안에서 정말 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창피한 존재처럼 내 존재가 무시된 것에 대한 분노,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배려하지 않은 태도에 대한 서운함, 혼자라는 서러움, 혼자 걷돌고 있는 듯한 이방인 같이 느껴지는 낯섦 등등 뭐라 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렵고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상하고 오묘한 감정들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