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남을 장면과 현실 사이, 그 사이에서

by Ding 맬번니언

우리의 그리스 여정은 스티븐 직원의 결혼식 때문이었다.

목적지가 로즈(로도스)였고, 그래서 산토리니를 뒤로한 채 비행기에 올랐다. 창문 너머로 파란 지붕과 흰 벽이 점점 작아질 때,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 평생 다시 산토리니 아니, 그리스에 올 수 있을까? 아마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 많다. 그래서 오이아(Oia)에서 하룻밤 백만 원을 지불한 선택이 “무리”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밤만큼은 분명 아깝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난간에 팔을 걸고 바다와 하늘이 겹치는 선을 오래 바라보던 그 시간은 가격표가 붙지 않는 종류의 기억이었으니까.

문제는 다음 행선지, 파리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인데, 이번에는 꼭 에펠탑이 보이는 방에서 아침을 맞고 싶다. 처음의 파리는 “그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지만, 한 번의 감동을 지나온 사람에게는 구체적인 욕망이 생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예약 사이트를 열어 남은 객실을 확인한다. 남아 있는 건 산토리니와 비슷하거나 더 비싼 방들. 하룻밤 백만 원이 훌쩍 넘어가고, 사흘이면 사백만 원을 거뜬히 넘긴다. 숫자를 보는 순간 마음이 주춤한다.

그때 내 안에서 두 사람이 토론을 시작한다.
한 사람은 속삭인다. “커튼을 젖히면 창틀에 걸린 철탑. 그 한 장면이면 평생의 피로가 보상돼. 이런 건 ‘다음에’가 없어.”
다른 한 사람은 묻는다. “그 장면의 값이 정말 사백만 원일까? 그 돈이면 다른 도시 두 곳을 더 볼 수 있어. 추억은 ‘뷰’가 아니라 함께 흘려보낸 시간에서 자라잖아.”

산토리니의 하룻밤은 나에게 두 가지를 가르쳤다. 첫째, 한 번의 과감함은 여행의 결을 바꾼다. 둘째, 모든 밤이 과감할 필요는 없다. 값비싼 방이 반드시 선명한 기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비행과 시차에 지쳐 잠들어 버리면, 반짝이는 철탑도 커튼 뒤에 갇힌다. 예약창의 “마지막 한 객실”이라는 경고문은 심장을 흔들지만, 통장을 설득할 권한까지 주지는 않는다.

현실은 늘 숫자의 언어로 말하고, 기억은 장면의 언어로 답한다. 어느 쪽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욕망의 무게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다시 묻는다. 이번 여행에서 반드시 품고 싶은 ‘단 한 장의 장면’은 무엇인가? 답이 또렷하다면, 하룻밤의 사치는 선택일 수 있다. 반대로 답이 흐릿하다면, 보이는 방 대신 보이는 시간을 늘리면 된다. 트로카데로의 새벽, 샹드마르스의 저녁, 센 강변의 바람 에펠탑은 호텔 창밖만이 아니라 도시의 수많은 자리에서 얼굴을 내민다.

파리 숙소 가격 하루에 백만원 혹은 이 백만원


부모로서의 책임, 앞으로의 계획, 통장 잔고. 이 셋은 어느 한쪽도 가벼이 여길 수 없다. 그렇다고 꿈을 접을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타협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단 한 밤의 과감함, 나머지 밤들의 담백함. 혹은 창밖의 탑 대신, 발걸음으로 찾아가는 탑. 어떤 구성을 고르든 중요한 건 결정의 출처다. 남들이 “그 자리가 명당”이라 해서가 아니라,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욕망에서 출발한 선택일 것.


로즈를 향하던 비행기에서 산토리니를 내려다보며 했던 질문은, 결국 파리에서도 이어질 것이다. 창틀에 걸린 철탑이든, 젖은 돌바닥 위로 길게 드리운 새벽의 그림자든 그 장면이 내가 고른 방식으로 도달한 순간에, 비로소 평생의 기억이 된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놀랍게도 숫자는 기억의 해상도를 흐리지 못한다. 선택을 통과한 장면만이 오래 남는다는 것을, 나는 이번 여행에서 다시 배우고 있다.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사는 멜번니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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