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행복이는 매년 호주 오픈에 간다. 그건 어느새 우리만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경기를 보고, 같은 순간에 환호했던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왔을 뿐이다.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이런저런 일들이 겹쳤고, 마음의 여유도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올해는 그냥 넘어가자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 굳이 안 가도 괜찮다고. 이미 충분히 많은 것들을 겪은 한 해였으니까.
그런데 오늘, 스티븐이 툭 던지듯 말했다.
“오늘 한 번 가보는 건 어때?”
그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렸다. 퇴근을 하자마자 나는 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마침 오늘은 남자 세계 랭킹 1위와 여자 세계 랭킹 1위의 경기를 모두 볼 수 있는 날이었다. 흔치 않은 기회였다. 그래서 그런지, 표는 이미 거의 다 팔린 상태였다. 남아 있는 건 5,500달러짜리 티켓뿐. 선택지는 사실상 없었다.
그래서 방향을 바꿨다. 두 경기 티켓은 포기하고, 그냥 입장권만 사서 분위기라도 느끼자고 생각했다. 오늘 입장권은 대략 8만 원 정도. 두 장이면 16만 원. 그 정도라면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경기장에 도착했다. 행복이가 좋아하는 테니스 그래서 표를 예매할 때 혹시 몰라서 다시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티켓을 물었다. 입장은 가능하지만, 가격은 한 사람당 30만 원이라는 것이었다. 순간 계산이 머릿속을 스쳤다. 지금 당장 구매하지 않으면 몇초 사이에 다른 사람이 구매 가능성이 높았다.
16만 원에서 60만 원으로 뛰어오른 지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금액이었다. 잠깐 망설였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포기하는 게 맞았다. 꼭 봐야 하는 경기도 아니고, 계획에도 없던 지출이었다. 하지만 그 옆에 서 있는 행복이를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아이의 눈에는 이미 오늘이 ‘특별한 날’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표를 샀다. 돈은 빠져나갔고, 마음 한편이 찌릿했지만 이상하게도 후회는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여자 세계 랭킹 1위, 아리나 사발렌카의 경기를 보게 되었다.
사발렌카는 벨라루스 출신으로, 세계 랭킹 55위의 아나스타시야 포타포바를 상대로 2–0(7–6, 7–6) 승리를 거두었다. 스코어만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경기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매 포인트마다 긴장감이 흘렀고, 관중석의 숨소리까지 느껴질 만큼 치열했다. 여자 경기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지만, 진짜 하이라이트는 남자 경기였다.
원래 오후 1시 30분에 시작해야 했던 경기는 앞선 경기의 접전으로 30분이나 지연되어 2시에 시작됐다. 그리고 그 코트에 카를로스 알카라스가 들어섰다. 알카라스는 프랑스의 코랑탱 무테(37위)를 상대로 3–0(6–2, 6–4, 6–1) 완승을 거뒀다.
경기는 일방적이었지만,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이미 ‘다른 레벨’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행복이는 거의 숨을 멈춘 채 경기를 봤다. 나는 아이의 옆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60만 원은 단순한 관람료가 아니라고. 이건 기록표에 남지 않는 경험이고, 아이의 기억 속에 남을 하루라는 것을.
돌아오는 길, 나는 다시 계산기를 두드려 보지 않았다. 대신 마음속으로 이렇게 정리했다. 돈은 다시 벌 수 있지만, 아이가 이 나이에, 이 순간에, 이런 장면을 직접 보는 경험은 다시 오지 않는다.
올해는 그냥 넘어가려던 호주 오픈.
결국 우리는 또 한 해의 기억을 하나 더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아이와 함께라면 가끔은 계산보다 마음을 먼저 움직여도 괜찮다는 걸 배웠다.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사는 멜번니언이 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