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디브까지 온 이유는 단순히 휴양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한 세월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나와 스티븐은 20년을 함께했다. 처음 만난 날은 3월 11일, Sydney였다. 그리고 2013년 3월 10일, 우리는 결혼했다. 계산해 보면 함께한 시간은 20년, 결혼 생활은 13년이다.
숫자로는 간단하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처음 시드니에서 그를 만났을 때를 떠올려 보면 그때의 나는 지금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한국에서 온 나는 아직 많이 불안했고, 게이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완전히 편안하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늘 어딘가 외딴섬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완전히 이해받는다는 느낌이 없었다. 그런데 호주에서 그리고 스티븐을 만나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누군가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 나를 고치려 하지 않는 관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일상이 내게는 아주 큰 변화였다. 20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함께 집을 꾸렸고, 행복이를 키우고, 일을 했고, 싸우기도 했고, 화해도 했다.
때로는 돈 때문에 고민했고, 때로는 미래 때문에 흔들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변화는 우리가 부모가 되었다는 것이다. 행복이가 우리 삶에 들어온 뒤 삶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자유롭게 살던 두 사람이 누군가의 하루를 책임지는 사람이 되었다. 학교, 운동, 숙제, 감정, 미래.
예전에는 둘의 문제였던 것이 이제는 셋의 삶이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지나 지금 우리는 몰디브에 와 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천천히 하루를 시작했다. 몰디브에서는 서두를 이유가 없다. 시간이 조금 느리게 흐르는 것 같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하루의 속도도 늦춰진다. 행복이가 함께 있지만 오늘만큼은 의식적으로 우리 두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가족 여행 안에서도 때로는 부부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20년이 지나며 더 잘 알게 되었다. 아침은 천천히 시작했다. 식당으로 걸어가는 길에도 굳이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익숙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침묵조차 불편하지 않다. Centara Mirage Lagoon Maldives의 아침은 조용했고, 바다는 여전히 믿기 어려울 만큼 맑았다.
20년 전에는 몰랐다.
한 사람과 이렇게 오래 살게 될 줄, 그리고 이렇게 먼 섬에서 같은 바다를 바라보며 아침을 먹게 될 줄. 그때의 우리는 늘 어디론가 가고 있었고, 무언가를 증명해야 했고, 서로를 붙잡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지금은 다르다.
증명할 것은 줄어들었고 설명할 것도 많지 않다. 서로 너무 잘 안다. 스티븐은 빌라 수영장 가장자리에서 조용히 기대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20년이라는 시간은 뜨겁게 사랑하는 시간이라기보다 함께 견디는 기술을 배우는 시간인지도 모른다고.
서로의 기분을 읽고, 굳이 묻지 않아도 오늘 어떤 상태인지 알고, 말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 안다.
젊었을 때는 사랑이 감정이었다면 지금은 구조에 가깝다. 서로를 무너지지 않게 받쳐주는 구조.
점심은 리조트 안 태국식당에서 먹었다. 배가 많이 고프지 않았지만 기념일이라는 이유로 조금 더 오래 앉아 있었다. 행복이는 중간에 지루해했고, 우리는 번갈아 아이의 반응을 살폈다.
그것도 우리의 20년 안에 포함된 풍경이다. 둘만의 식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둘만의 시간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아이 사이에 두고도 부부는 부부의 시간을 만든다. 점심을 먹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바다 색이 오전보다 더 짙어져 있었다. 몰디브의 바다는 시간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아침에는 투명하고, 점심에는 눈부시고, 오후에는 조금 더 깊어진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관계와 닮아 있다고 느꼈다.
처음에는 서로가 너무 투명해서 모든 것이 다 보일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 깊이가 생기고 겉으로 보이지 않는 층들이 생긴다. 20년의 관계도 그렇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의 결이 있다.
기쁨, 실망, 오해, 이해, 포기하지 않은 시간들.
저녁이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했다. 낮 동안 뜨겁게 머물던 공기가 서서히 부드러워졌고, 바다 위의 빛도 조금씩 색을 바꾸기 시작했다. 우리는 저녁 식사를 위해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오늘 저녁은 조금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바닷가에서 로맨틱 디너를 신청했다. 단둘이 바다 바로 앞에서 저녁을 먹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기념일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하루가 큰 사건 없이 조용히 흘러갔다는 사실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사실 긴 시간을 함께 산 사람들에게 특별한 날은 거창한 이벤트보다 문제 없이 지나가는 하루일 때가 많다.
누군가 아프지 않고, 예상치 못한 감정 충돌도 없고, 서로 피곤함 속에서도 무리 없이 하루를 마치는 것.
그 평범함이 오히려 쉽지 않다는 것을 오래 함께 살수록 더 잘 알게 된다. 오늘 저녁 식탁 앞에서 나는 잠시 스티븐을 바라보았다. 20년 전에는 이 사람이 내 삶의 이렇게 큰 부분이 될 줄 몰랐다.
처음에는 그저 서로에게 끌렸고, 함께 있는 시간이 즐거웠고, 미래보다 현재가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런데 시간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만든다.
함께 살아낸 시간,
서로를 견딘 시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
좋은 날보다 힘든 날이 더 선명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결국 그 시간들을 함께 통과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쁜 순간은 지나가지만 힘든 순간은 관계의 구조를 만든다. 어떤 날은 말 한마디가 상처가 되었고, 어떤 날은 침묵이 더 길었고, 또 어떤 날은 서로 다른 방향을 보기도 했다.
그런 시간들을 지나 오늘 이렇게 같은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다는 것이 오히려 더 깊게 느껴졌다. 몰디브의 해는 천천히 내려갔다. 하늘의 색은 금빛에서 주황으로, 주황에서 보랏빛으로 천천히 바뀌었다. Centara Mirage Lagoon Maldives 앞 바다는 마지막까지 빛을 붙잡고 있었다.
빛이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물 위에는 잔잔한 반짝임이 남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사랑도 어쩌면 비슷하다.
처음의 강한 빛은 줄어든다.
모든 것이 새롭고 뜨겁던 시절은 지나간다.
하지만 오래 함께한 관계에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잔광이 남는다. 크게 드러나지 않아도 분명히 존재하는 빛.
익숙함 안에서 생기는 안정감,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가능한 배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감정.
오늘 하루 우리는 어쩌면 20년 전보다 더 밝게 빛났다. 젊음의 빛과는 다른 종류였다.
더 조용하고,
더 깊고,
더 오래 남는 빛.
20년을 함께 보낸 사람과 한 섬에서 천천히 하루를 끝낸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념일다웠다. 그리고 아마 오늘을 오래 기억날 것이다. 화려한 장면 때문이 아니라, 이 하루가 너무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시간을 닮아 있었기 때문에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사는 멜번니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