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눈 깜빡 할 만큼 순간이었다. 오늘 아침 우리 집 수영장 근처에서 놀고 있었는데 바로 옆에 있던 행복이가 수영장에 빠져버린 것이다. 나는 생각은커녕 어떤 판단도 할 겨를 없이 옷을 입은 채로 바로 물속에 뛰어 들어가서 행복이를 물 밖으로 앉고 나왔다. 그 후 행복이를 안심시키고 점심을 먹이고 재웠다.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아까부터 지금까지 내가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못했음을 순간 깨달았다. 심장은 지금까지도 튀어 나올 듯이 뛰고 있었고 온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니 내 무릎이 까져있는 게 아닌가.
부모가 되면 자식이 나 자신과 같아 언제나 먼저가 된다는 순간을 처음 실감했다. 행복이가 빠졌다는 걸 자각한 순간부터 오로지 모든 정신과 몸이 '행복이가 무사해야 해!'로만 채워진 것 같이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나 간절하고 본능처럼 움직이는 게 부모의 마음인데.. 요즘 한국에서 들리는 원영이 소식을 들어보면 원영이의 아빠와 계모 이야기에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과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동시에 든다. 어떻게 아이에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힘없고 불쌍한 아이를 춥고 고통 속에 죽인 것은 그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 같다. 스스로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오로지 부모의 보살핌과 사랑을 바라고 있을 아이에게 그런 짓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나는 행복이가 물에 빠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내 탓인 것만 같아 괴롭고, 캘록 거리는 행복이의 기침 소리 한 번에 무언가 잘못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까지 드는데 그 사람들은 두렵지 않았을까? 아이가 하늘나라로 떠나 버렸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정말 슬프다. 사랑만 받아도 모자랄 사랑스러운 아이였을 텐데..'부디 다음 생에는 더 큰 사랑을 받고 태어나렴.. ' 혼자 아이를 위해 기도도 해본다.
자식을 키우는 것은 정말 힘들다. 그리고 남의 자식을 키우는 것은 더 힘들다.
흔히 ‘낳은 정’과 ‘기른 정’이라고 하지 않던가? 비단 엄마뿐만 아니라 아빠라도 혈연으로이어진 친자식과 혈연이 이어지지 않은 체 만난 자식은 다른 걸까? 나는 9년째 스티븐의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고 1년 남짓 행복이를 키우고 있지만 특별히 그 두 가지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 기른 정으로 함께하는 자식과 친자식보다 더 끈끈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분들의 기사를 보면 그것이 거짓된 사랑이라고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와 스티븐의 아이들 조슈아, 소피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면 내가 그 아이들을 어떻게, 어느 정도의 애정과 관심으로 대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서로 도와주며 원만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만났을 당시 나는 부모가 되어본 적이 없었기에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내가 맺어온 관계 말고는 알지 못했고 태어날 때부터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야 진짜 가족처럼 지낼 수 있을지 너무 어려웠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깊게 관여하거나 훈육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기본적으로 한국에서 자라 호주에 온 성인 남자와 내내 호주식 교육을 받고 살아온 미성년의 아이들이 처음부터 적당한 관계를 유지할 줄 안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던 것 같다. 그래서 처음엔 하우스 메이트처럼 그저 같은 집 안에 생활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존재에 가까웠다.
물론 스티븐의 아이들이 아무런 신경 써야 할만한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나도 내 역할이나 지켜야 할 선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느 10대~20대 아이들이 그렇듯 어른의 시각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명확한 해결법이 없는 그런 일들을 벌이는 평범한 아이들이기에 사고를 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스티븐은 친부모이기에 화를 내든, 훈계를 하든 어느 것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나의 경우에는 매번 나를 시험하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가 있지?', '아니 스티븐은 어떻게 저렇게 반응하는 거야?' 라고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특히 행복이가 커 가면서 행복이를 키우는 것이 점점 더 버거워지고 있어서인지 요즘엔 한층 더 함께 사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늘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조슈아, 소피아도 마찬가지이겠지. 행복이가 아무리 예뻐도 함께 같은 집에서 어린 아기가 있다 보면 집안에서 계속 신경을 써야 하는 것들이 많아 그것이 마냥 편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조슈아와 소피아도 나름대로 참으며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팥쥐 엄마는 정말 정말 너무 솔직한 사람이었던 것 아닐까?
내 자식은 마냥 예쁘고, 잘되었으면 좋겠고, 남의 자식인 콩쥐가 미워 뭐든 못했으면 좋겠고 잘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던 것 아닐까? 하지만 내가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을 함께 키우며 살아보니 그렇게 솔직하고, 단순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어떤 땐 진심으로 사랑스럽고 고맙고 가족 같고, 어떤 땐 '남의 자식이라서 이렇게 뭐든 밉게 보이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 만큼 함께 살고 있다는 게 견딜 수 없는 순간도 있다. 가족으로서 끈끈한 정과 가족이라서 너무 가까워서 서로 서운하고 마음이 상하고 미운 감정 같은 것이 모두 함께 우리와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아니면 자식이라는 존재가 원래 이런 것일까? 행복이에 대한 내 감정도 모든 순간이 한결같이 좋지는 않다. 어떤 날은 밉고, 귀찮기도 하고, 너무 힘들어서 나만 돌보고 싶은 순간도 있다. 그렇게 온갖 감정이 뭉쳐져 행복이에 대한 사랑으로 감싸져 있듯 조슈아, 소피아에 대한 감정도 그렇게 온갖 것이 합쳐져 있는 것이 아닐까?
아이를 가지면 부모라고 불리지만 부모가 되는 것은 이런 모든 과정과 시간을 견뎌낸 후인 것 같다. 이제 16개월밖에 행복이의 아빠로서 살아오지 못했지만 그간 정말 매일매일이 다채롭다고 할 만큼 여러 사건사고를 겪으며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행복이의 부모로서 내 혈연이 이어진 아이를 키운다는 게 얼마나 경이롭고 대단한 순간인지 깨달아가고 있으며, 조슈아와 소피아와 같이 살아가며 부모의 역할이라는 게 꼭 혈연이나 어떤 것에 기대어서만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아가고 있다.
내가 깨달은 것은 부모가 되려면 먼저 내 내면을 성숙하게 만들며 점점 더 나은 어른이 되기 위한 고민과 노력을 해 나가야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진짜 부모가 될 수 있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행복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나라는 사람은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이기적이고 어린아이 같았다.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며 내가 가장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점 내가 아닌 행복이를 위해, 주변 사람들을 위해 이전의 내가 포용하지 못했던 부분들까지 포용해가고 있는 나를 느낄 때가 있다. 그런 변화들이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이 좋다. 그리고 좀 더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