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라 하면, 나는 못 가네"
공항은 언제나 신선함을 준다.
일상에서 벗어나 미지의 낯선 곳으로 갈 때면 늘 느끼는 감정들인 설렘과 기대감 그리고 왠지 모를 약간의 긴장감 등이 여행객을 감싸고돌기 때문인 듯하다. 익숙했던 이곳의 지금을 떨치고, 새로운 공간과 시간으로 옮겨가는 절차가 펼쳐지는 곳이다.
당시 김포공항 국제선 출국장이다. 꽤 오랫동안 그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세월 속에 녹아진 그 날짜는 어렴풋하다. 1993년 가을, 아마도 추석이 조금 지났을 무렵인 10월 초순의 어느 날이다. 한 낮엔 아직 날카로운 가을햇살이 묻어나던 때, 나는 익숙했던 공간을 뒤로한다. 유학을 떠나기엔 늦다면 늦은 서른을 넘긴 나이에 프랑스 리옹(Lyon)을 가기 위해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어찌 보면 수많은 인파 중의 한 명인 평범한 출국이지만, 그것이 10년간의 외출이 되리라곤 나는 물론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혹시 운명의 신이 있다면, 알고 있었을까만은.
아마도 이럴 때 딱 들어맞는 말이 불어로 ‘쎌라비’(C’est la vie: 그게 인생)가 아닐까 싶다. 그 출국이 10년간의 외유가 될 것이란 걸 그때 알았었더라도 떠났을까? 아마도 몰랐기에 떠날 수 있었으리라. 지금 다시 하라고 한다면, 난 아마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지 않을까 싶다.
“다시 가라 하면, 나는 못 가네”
근데, 그때 나는 왜 그랬을까?
나에게 그 무렵은 앞날에 대한 막연함과 모호함, 불확실성과 답답함과 갑갑함으로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던 듯싶다. 어떤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며 살아온 나 자신, 스스로의 삶에 대한 절박함이나 그것을 깨뜨려 보고자 하는 도전이나 변화의 용기도 없었던 내 모습에 지쳐있었던 시기였다. 어찌 보면 익숙한 안전지대에만 머물러 있었던 삶이었다. 그러기에 별다른 변화와 발전도 없었던 시간으로부터, 그럭저럭 그냥 살아온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었고, 벗어나야만 했던 그즈음이었다고 여겨진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소설 <데미안> 속에 나오는 '새'가 나였나 보다. 알에서 나오려고, 자신의 세계에서 나오기 위해서 싸우는 새가 그때의 내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의 현재 세계를 깨뜨려야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것처럼 당시의 나는 나에게 간절했다.
한낮 사막 한가운데 홀로 서보고자 했던, 인생에 한 번은 그러고 싶었던 그런 도전. 나는 내 작은 울타리를 너머, 또 다른 세상과 마주하고자 했다.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사람은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까? 나 혼자 모든 걸 감당하며 자신과 마주 서고픈, 어찌 보면 만용이었을지도 모를 도전을 감행하기로 했다. 물론 그 대가는 두고두고 혹독했다.
프랑스어를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나는 불어라고는 두 단어 ‘위(oui, 예)’와 ‘농(non, 아니요)’만을 알고 비행기에서 내렸다. 아무리 불어 한마디 모른다 해도 “예스·노”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아주 소박한 생각의 발로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한동안 전혀 쓸 수 없는 두 단어였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면 ‘예/아니요’ 조차도 할 수도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거 참 무슨 얼토당토않은 생각의 발로였으며, 당연한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도대체 뭔 소린지를 알아들어야 ‘그렇다’ ‘아니다’라고 할 터인데… 참으로 어이없는 생각이었음을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바로 알게 되었다.
누군가 불어로 무슨 말을 하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언제나 그냥 어정쩡한 미소로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아마도 그때 당시에 프랑스 사람들은 나를 '미소 띤 과묵한 동양인' 쯤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싶다.
그 이후 2년 좀 안 된 리옹에서의 생활과 파리로 옮겨 온 유학생활은 ‘좌충우돌 황당무계’로 점철되었다. ‘무식이 용기’였기에 지낼 수 있었던 시간들은 꽤나 길었다.
때로는 이방인으로서의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 프랑스에 적응되어 갔다. 다른 모습의 사고방식과 삶의 모습을 보면서, 시간과 더불어 경직되었던 나의 자아(自我)는 그 모습을 차츰 변화시켜 나갔다.
그런데도 정말이지 물 한 통에 의지하여 혼자서 사막을 헤매는 듯한 느낌은 두고두고 이어졌다. '바람 부는 허허벌판에 혼자 서 있는 내 모습'이 잠자리에 누울 땐 언제나 머리맡에 웅크리고 있었다.
간단한 불어 단어 하나도 온전히 모른 체 시작한 나의 유학 생활은 우여곡절 끝에 박사학위를 받는 데 까지 꼬박 10년의 시간을 홀로 버티면서 지속하게 된다. 그리고 프랑스에서의 학위논문 공개구두심사인 '쑤트넝스'(soutenance)를 통과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함으로써 나는 유학생활의 막을 내리게 된다.
일반대중에게까지도 공개되는 논문심사와 심사결과가 발표되는 '쑤트넝스' 당일은 내 생애 최대로 긴장했던 날이었다. 심사위원장은 공개된 '쑤트넝스'에 참석한 모든 청중들과 나를 앞에 두고 심사결과를 발표한다. 그 순간 지나간 십 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심사결과 발표 직전, 머릿속까지 새하얘지고 마는 긴장감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박사학위논문은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제일 좋은 평가를 받으며 통과됐다. 그 찰나, 앞선 긴장감에 하얀 햇살이 가득 내린다. 그날의 '쑤트넝스'는 가슴 터질듯한 긴장에서 일순간 멍해지는 기쁨으로 이어지는 시간으로 각인되어 남아있다.
김포공항에서의 어떤 출국으로부터 10년이 지난 그해, 11월 말의 쌀쌀함이 묻어나는 인천공항에 내가 탄 비행기는 내려앉았다. 온전한 귀국인 셈이었다.
현재의 울타리를 벗어나고자 했던 옛 시절의 순간, 옭아맨 테두리를 깨뜨리려 했던 몸부림.
무모함을 기꺼이 감내해 보고자 했던 그때의 시간들.
스스로를 벗어나 알고자 했고, 도전으로 새로움을 추구하려던 그때 그 시절.
이젠 추억의 편린(片鱗)이 되어, 때때로 꺼내 보곤 한다.
아마도 앞으론 다시 그때 그 시절과 같은 무모하다 싶은 도전을 시도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마음가짐과 몸부림이 그리울 때도 있다. 다시금 공항으로 가봐야 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