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아 비치의 용기와 문학적 자유를 따라
오데옹 극장 앞 광장이 맞닿아 이어지는 오데옹 길(Rue de l’Odéon).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헤밍웨이가 자신의 파리 시절 회고록 《A Moveable Feast》에서 직접 언급하며 종종 회상했던 서점이 있던 자리를 만나게 된다.
오데옹 길 12번지.
이곳은 미국인 '실비아 비치'(Sylvia Beach)의 영어권 문학 전문 서점인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Shakespeare and Company)가 있었던 자리다. 실비아 비치는 1919년 처음 이 서점을 개점한 뒤, 1921년 무렵에 더 넓고 찾기 쉬운 공간을 찾아 오데옹 길 12번지로 이전하여 새롭게 문을 열었다.
실비아 비치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당시엔 서점 겸 도서 대여점이었고, 많은 작가들이 드나들며 자연스레 어울리던 문학적 아지트였다. 우리가 잘 아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헤밍웨이를 비롯해,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위대한 게츠비》의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 영문학의 최고 걸작 중 하나인 《율리시스》의 제임스 조이스, 그리고 《황무지》로 모더니즘의 새 지평을 연 시인 T. S. 엘리엇까지, 20세기 문학의 거장들이 이곳에 드나들며 서로의 문장과 삶을 나누던 자리였다.
헤밍웨이는 캐나다 신문 '토론토 데일리 스타'(Toronto Daily Star)의 해외 통신원 신분으로, 첫 아내 해들리(Hadley)와 함께 1921년 말경 파리에 첫발을 딛었다. 당시 20대 초반의 젊은 헤밍웨이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문학에의 열정을 키우며 작가로서의 재능을 다져나갔다. 그는 이곳에서 책을 대여해 읽고, 서점 주인 실비아 비치와 대화를 나누며 문학적 세계를 넓혀갔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단순한 서점을 넘어, 작가들의 사랑방이자 피난처였다. 오데옹 길 12번지 이곳은 편지를 대신 받아주는 우편 주소가 되어 주었고, 생활이 절박할 때 돈을 융통해 주기도 했다. 책과 사람, 그리고 신뢰와 문학이 함께 숨 쉬던, 그 시대만의 공기와 자유가 살아있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특히 1922년, 실비아 비치는 영국과 미국에서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출간이 금지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Ulysses)》초판을 기어코 세상에 내놓았다. 그 용기와 자유는 이 작은 서점을 단숨에 전설의 무대로 만들었다. 금지된 걸작의 출간은 검열과 금지의 벽을 넘어서는 파리 자유정신의 발현이자, '문학적 자유'를 향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문학사에 뚜렷한 이정표로 남았다.
그날 이후 오데옹 길 12번지는 당시 파리에 모여든 영어권 젊은 문인들의 거점이자, 20세기 문학의 작은 심장부로 자리 잡았다. 당시의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 작가들에게 파리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파리는 '자유로운 문학의 수도'이자, 검열과 제약에서 벗어나 글로써 인간의 자유를 실험하던 살아있는 창작의 터전이었다.
오늘도 오데옹 길 12번지의 빛바랜 벽면에는 연회색 석재로 된 기념 명판이 조용히 걸려있다. 그 위에는 "1922년에 이 건물에서 실비아 비치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출간하였다"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짧은 한 문장이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의 깊이는 길고도 묵직하다. 이 명판은 한 세기 전, 작은 영어 서점에서 피어올랐던 '문학적 자유'에 대한 열망과, 그 자유를 얻고자 했던 인간의 깊은 갈망이 한 시대의 문학 지형을 바꾸어 놓았음을 고요히 증언하고 있다.
가을 햇살에 잠긴 세월의 돌결 사이로, 오래된 책 냄새와 새 책의 잉크 냄새, 그리고 활자가 남기는 오래된 여운과 서가의 숨결이 아주 천천히 되살아나는 듯했다.
실비아 비치의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독일군의 파리점령 시 강제 폐업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찾는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1951년, 미국인 조지 휘트먼(George Whitman)이 노트르담 대성당 건너편 센강 좌안에 '르 미스트랄'(Le Mistral)이라는 이름으로 연 서점에서 비롯된다.
그는 1964년, 실비아 비치를 기리며 서점의 이름을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로 바꾸고, 그녀가 남긴 문학적 전통과 자유의 정신, 그리고 작가와 독자를 품어주던 인간적 온기를 이어받고자 하였다. 현재는 그의 딸 실비아 휘트먼(Sylvia Whitman)이 운영을 이어가며, 이 서점의 역사를 현재진행형으로 써 내려가고 있다.
파리의 영어권 문학의 성지라는 상징성과 헤밍웨이의 유명세 덕분에, 이곳은 언제나 세계 각국의 사람들로 붐빈다. 특히 젊은 여행자들에게는 꼭 들러봐야 할 장소로 여겨져, 수많은 여행안내 책자와 블로그에 빠짐없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서점 바로 옆에는 예전엔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카페'(Shakespeare and Company Café)가 2015년에 문을 열어, 이제는 책과 커피가 함께 어우러지는 새롭게 변화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제 이 서점은 단순히 책을 '사는 곳'을 넘어선, 또 하나의 문화적 쉼터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서점 앞에는 기다림의 줄이 늘어서 있었고, 그 기다림마저 문학의 한 장면처럼 이곳 풍경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강 건너로 보이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첨탑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와, 이곳의 시간을 한층 더 운치 있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파리의 하루가 저물어 간다.
어딘가 새로우면서도 익숙한 이 도시가 이제는 오래된 친구처럼 나를 맞이한다.
"나는 항해한다"는 뜻의 나비고(Navigo). 그 이름처럼, 출항한 나의 여정은 이 도시의 시간 속을 흐르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나 자신을 잇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배어 흐르는 식당 폴리도르에서는 '진실한 문장'을 찾아 애쓰던 헤밍웨이를 떠올린다.
오데옹 광장의 오래된 극장에선 풍자와 해학 속에 '사회적 자유'의 숨결이 피어났고,
실비아 비치의 오데옹 길 12번지 서점에서는 '문학적 자유'가 움텄다.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서로 다른 언어와 얼굴을 지녔지만, 인간은 언제나 자유를 열망해 왔다. 그 열망은 진솔한 문장처럼 꾸밈이 없고, 자유롭고 진정한 삶을 향한 깊은 희구에서 비롯된 시대를 넘어 이어지는 우리 내면의 갈망이었다.
이 도시에는 시대를 달리해 태어난 자유의 기운이 여전히 흐르고 있다.
세월을 건너온 그 기운은 거리의 공기 속에 은근히 스며들고, 오래된 극장과 옛 서점의 벽 사이를 지나며, 지금의 파리와 맞닿으며 길 위로 조용히 번진다.
그리고 나의 기억 속에도 잔향처럼 머무르며, 삶과 문학이 이어지는 길 위에서 또 다른 나를 일깨운다.
결국 파리가 내게 건넨 것은 자유를 향한 인간의 의지, 그리고 진솔한 삶의 문장들이었다.
다시 찾은 파리에서 나는 과거의 나와 오늘의 나를 함께 마주하며, 오래도록 간직될 또 한 장의 추억을 조심스레 덧붙인다.
삶과 문학, 그리고 자유의 여정이 이어지는 그 길 위에서 나는 여전히 항해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