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종과 현충일

<보리밭>, <광복절 노래>의 작곡가 윤용하 선생

by 나름펜

24 절기는 양력이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른 기후변화를 반영하여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절과 각각의 계절별로 대략 15일 간격으로 6개 절기들을 갖게 되어, 모두 24개의 절기로 구성된다. 농경사회에서는 농작물 재배에 지침을 주고, 각 절기마다 특유의 명칭과 풍습 등도 나타내준다. 이러한 24 절기의 명칭은 중국 주나라 때 서안(西安: 한나라 때 장안(長安)) 부근의 기후 상태에 따라 붙여진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라, 우리나라의 실제 날씨와는 잘 맞질 않는 게 사실이다. 우리의 경우엔 입춘, 입하, 입추, 입동 등 계절을 알리는 절기 날짜로부터 한 달 후쯤에야 그 해당 계절이 시작된다고 보는 게 상례(常例)라 할 수 있다.




망종(芒種)


어느덧 24 절기상 여름의 세 번째 절기인 '망종'이다. 망종은 보통 6월 5일 혹은 6월 6일이다. 망종의 한자어는 <까끄라기(수염)> ‘망(芒)’에 <씨(씨앗)> ‘종(種)’이다. '까끄라기'란 벼나 보리 따위같이 낟알 껍질에 붙은 깔끄러운 수염을 말한다. 망종 무렵이 수염(까끄라기) 있는 곡식을 거두고, 심기에 적당한 시기다. 즉, 이 무렵보리를 모두 베고 모를 심는다.

옛 속담에 “보리는 망종 전에 베라”고 했듯이, 망종에는 햇보리를 먹게 될 수 있으니 보릿고개의 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모내기와 보리베기가 겹치는 이 무렵농사일은 더욱 바쁘게다. 그래서 "발등에 오줌 싼다"라고 할 만큼 농가에서는 일 년 중 제일 바쁜 시기이다.


한편, 우리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뜻을 기리고 추모하며 그 명복을 기원하는 현충일은 망종(芒種) 무렵이다. 현충일을 6월 6일로 지정한 것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절기 중에 망종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망종 때는 제사를 지내기가 좋은 날이며, 현충일이 처음 지정된 1956년 당시 6월 6일이 망종이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다.




가곡 <보리밭>


계절상의 절기가 망종과 맞물리다 보니, 자연스레 가곡 '보리밭'이 은근히 내 머릿속을 맴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따스한 서정이 돋보이는 박화목(1924~2005) 작사, 윤용하(1922~1965) 작곡의 이 노래 <보리밭>6·25 전쟁이 한창일 때 만들어졌다. 사실 1951년 가곡으로 탄생하여 1952년에 처음으로 초연(初演)하였다는 데, 그때 당시인 50년대에는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러다가 작곡가 윤용하 선생의 사후(死後)인 1971년 가수 문정선이 부르면서 가요로 먼저 더 유명해진 노래이기도 하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븬 하늘만 눈에 차누나

《보리밭》 박화목 작사, 윤용하 작곡
가곡 <보리밭>_생성형 AI 이미지

노래에 대한 에피소드도 있는데, 6·25 전쟁 시절 피란지인 부산 자갈치 시장의 한 대폿집에서 황해도가 고향인 선후배가 만났다. 당시 두 사람은 시인 박화목 종군기자, 작곡가 윤용하는 해군음악대원(종군작곡가) 신분이었다고 한다. 당시 윤용하가 전쟁에 지친 국민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단다. 박화목 시인이 자신의 고향마을 보리밭을 떠올리며 작시하여 건넨 시 제목은 <옛 생각>. 그런데 며칠 뒤 작곡가 윤용하가 완성한 오선지엔 <보리밭>으로 제목을 바꿔 달았다고 한다.


부산 남포동 자갈치시장 친수공간에는 작곡가 윤용하 선생과 가곡 '보리밭'을 기념하고, 그 태동지임을 알리는 '보리밭 노래비'가 건립되어 위치하고 있다. 이 노래비에는 악보 원본과 작곡하게 된 배경, 윤용하 선생의 생애 등이 새겨졌다는 보도를 찾아 접할 수 있었다.


또한 가곡 '보리밭'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피란시절 부산 광복동의 '다방 밀다원(茶房 密茶苑)'에 다다르기도 한다. 당시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던 '밀다원' 다방에서 이 가곡이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이 다방은 부산으로 피란 내려온 문인들을 중심으로 다방면의 예술인들이 모여드는 장소였다. 밀다원 다방은 피란 당시 한국 예술의 중심 장소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소설가 김동리(金東里, 1913~1995) 선생이 1955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밀다원 시대'를 통해 그 장소와 그때 시절 이야기를 음미해 볼 도 있다.




순수 예술인 '윤용하' 작곡가


가곡 <보리밭>작시한 아동문학가 겸 시인 박화목(朴和穆, 1924~2005)은 동요 <과수원 길>작사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노래를 작곡한 윤용하(尹龍河, 1922~1965)<광복절 노래>와 동요 <나뭇잎 배>의 작곡가이기도 한데, 특히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자신의 삶과 예술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했던 천재 작곡가란 평이 새롭다.


2009년 부산 자갈치시장의 '보리밭 노래비' 제막식을 앞두고, 작곡가 (고)윤용하 선생의 따님은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당시 박화목 시인과 매일 만났다"라고 전하고 있다. 시인과 음악인으로 당시 두 사람은 같은 황해도 출신의 고향 선후배로 만나 의기투합하여 금세 친해졌을 터이고, '밀다원' 다방도 자갈치 시장의 대폿집도 자주 드나들지 않았을까 여겨본다. 그러니 가곡 <보리밭>의 탄생을 자갈치시장의 한 대폿집이라 하든, '밀다원' 다방이라 하든, 다 맞는 얘기일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박화목 시인작곡가 윤용하에 대해 "미련할 정도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순수 예술인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작곡가 윤용하 선생은 생전보다 사후에 재조명되면서, "각광받는 우리나라 작곡계의 선구자로 격변의 시대를 살아내며 신앙과 음악에 몰두한 그의 삶"이란다. 43세로 요절한 일생을 가난하게 살았던 천재 음악인, 순수 예술인 '윤용하'가 내 가슴에 진하게 울림으로 와닿는 오늘이다.




호국보훈의 달에 절기 망종과 현충일을 즈음해 국민가곡 '보리밭'을 떠올리다가 우연찮게 알게 된 얘기들.

내가 모르고 무심히 그냥 지나쳐버린 지난 시절을 고스란히 오늘의 내 마음속으로 옮겨 놓는다. 다가오는 8·15 광복절엔 순수했던 예술인 '윤용하' 선생을 떠올리며, 그가 작곡한 <광복절 노래>를 새삼 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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