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어쩌다가 동요 <얼룩송아지>를 아주 오랜만에 듣게 되었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로 시작되는 <얼룩송아지>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노래다. 그러다가 이 동요의 가사가 시인 박목월 선생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얼마 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런 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지금껏 무심했던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시인 박목월(朴木月, 1915~1978) 선생은 1915년 경주 출생으로 24살이던 1939년 등단했다. 정지용(鄭芝溶, 1902~1950) 시인은 "북에는 소월, 남에는 목월이 있다"라고 헌사(獻詞)했다고 전해진다. 우리에게 박목월 시인은 대표적 서정시인이자, 조지훈(趙芝薰, 1920~1968) · 박두진(朴斗鎭, 1916~1998)과 함께 청록파(靑鹿派)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언론보도와 텔레비전 프로에서 2024년 3월 경에 이미 소개된 바, 박목월 시인의 미발표 육필 원고의 새로운 시 166편을 공개한다는 소식이 알려졌었다. 지나간 기나긴 시간 동안 시인의 노트 62권이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보관됐다. 시인의 남겨진 빛바랜 누런 노트 속 400편의 시 중에서 작품의 형태를 완전히 갖춘 시만을 엄선하여 공개한다고 전해졌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6·25 전쟁과 피란살이 그리고 가난과 생활고 등 숱한 질곡의 시간을 견뎌온 시인의 노트다. 뒤늦게나마 다시 세상 빛을 볼 수 있다니 참으로 벅찬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 오래된 시인의 노트 자체가 갖는 시간의 무게와 곡절들을 헤아리니 오늘도 다시금 가슴이 먹먹해져 온다.
시인 박목월 선생의 시 중에서 그래도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시는 역시 교과서에 수록되었던 <나그네>가 아닌가 싶다. "나그네"에는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芝薰(지훈)"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는 데, 시인 조지훈의 시 <완화삼(玩花衫) -목월(木月)에게->에 대한 답시로 한국의 대표적인 화답시(和答詩)로 알려져 있다.
江(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 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남도) 三百里(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나그네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芝薰(지훈)》 박목월
향토적이며 서정적으로 노래한 나그네를 읊조리자니, 오랜만에 이 시를 처음 접했던 학창 시절 국어 시간이 떠오른다. 당시에 나는 이 시를 그저 교과서에 수록된 한 편의 시로, 시험에 대비하기 위한 공부의 대상으로 여겼던 터였다. 그 시절 나는 이 시구절에 짙게 베여있는 그 서정적 마음을 내 가슴에 전혀 깊게 담지 못했다. 인생의 뒤안길로 접어든 지금에야 비로소 이 시의 깊은 풍미를 음미하게 된다. 난 참으로 더딘가 보다.
'나그네'라는 시어(詩語)때문인지 가수 최희준(1936~2018)의 옛 가요 <하숙생>의 곡조와 가사가 연이어 스치며 지나간다.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그네'와 '하숙생' 모두 어떤 동질의 교감을 갖게 하여 겹쳐서 떠올렸나 보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하숙생》 작사: 김석야, 작곡: 김호길, 원곡: 최희준
살아가노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느낄 만한 그런 것이 있다. 고향, 고독, 그리움, 정체성, 향수 등이 그것이 아닐까 싶다. 떠도는 삶을 사는 듯한 우리의 실존적 모습은 인간의 내면에 깃든 고독과 그리움을 품에 앉고 있다. 정체성을 찾기 어려워 언제나 길 위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겉도는 듯한 내면을 발견하기도 한다. 떠나고 싶은 마음과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내 마음의 이중성을 보기도 한다.
오늘은 무리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외로움과 진한 그리움을 느끼는 그런 날이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