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닥불 피워 놓고 마주 앉아서...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어릴 적 캠프파이어에서 빠짐없이 흘러나오던 노래다. 1970년대를 풍미했던 통기타 가수이며 음유시인으로 불렸던 박인희 씨의 <모닥불>이다.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되고 지금도 남녀노소 흥얼거리는 <섬집 아기>의 가수이기도 하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가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대중음악에 깊은 지식은 없지만, 그래도 노래를 사랑하고 들어 온 경력이 짧지 않아 대중음악의 가사에는 당대의 시대적 감성이 녹아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나는 어릴 때 할머니와 한 방을 쓰면서 흑백 TV를 일상에서 끼고 살았다. 그래서인지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까지의 노래들을 많이 알기도 하고, 40년이 지난 지금도 가사를 정확히 기억하는 노래가 많다. 어린아이가 당시 성인들의 감성을 흠뻑 느끼면서 자란 것이다.
이 당시 노래들은 한결같이 노랫말이 주옥같이 아름답다. 한 편의 시라해도 과언이 아닌 아름다운 가사로 쓰인 노래들이 많았다.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이 한 줄의 표현으로 압축해 낼 수 있었을까?
젊음 : 부족함이 있었지만, 뜨거웠던 열정
오늘 교외로 홀로 여행을 떠나 '불멍' 시간을 가져 보았다. 화덕 안에 장작을 지그재그로 얹고 불을 피워 봤지만 계속 실패를 했다. 비가 왔던 탓이라 그런지 장작에 불이 잘 붙지 않는 듯했다. 장작의 위치를 바꿔 보기도 하고, 토치를 조절해 보기도 하고...
문득 사춘기를 거쳐 20대 초반까지의 우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방황도 해보고, 아파도 해보고, 모든 것이 서툴기만 했던 그 시절 우리의 모습과도 흡사한 느낌이 들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드디어 불이 붙었다. 불이 잘 붙는 참나무 장작이라 그런지 한 번 불이 붙으니 금방 불길이 솟아올랐다. 불똥이 튀고, 그 열기에 조금씩 의자를 뒤로 물리기도 했다. 솟아오르는 불길이 멋지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안에 들어가면 세상 모든 것을 다 태워 버릴 듯이 활활 타올랐다.
20대 후반에 시작한 나의 사회생활은 거침없이 달려가는 기관차였고,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과도 같았다. 사회생활 3년 차에 찾아온 IMF 위기부터 시작해 온갖 굴곡진 시간들을 보내면서도 늘 씩씩했고, 한결같이 열정적이었다. 일하느라 밤을 하얗게 지새운 날도 많았다.
하지만 너무나도 뜨겁게 타오르는 장작불이 어떤 것도 품어 내지 못하고 다 태워 버리듯, 나의 뜨거운 열정의 시기는 여유와 관용, 공감과 배려가 부족한 부끄러운 시간들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현재 : 은은한 뜨거움과 온기를
'불멍'의 하이라이트, 고구마를 은박지에 싸서 굽는 시간이다. 불꽃이 뜨거울 때 고구마를 밀어 넣어 놓았지만, 계속 활활 타오르는 불꽃은 고구마를 제대로 익혀내지 못하고 태워 버린다. 불길이 대충 잦아들고, 예쁜 불씨가 살아 있는 후반부가 고구마를 맛있게 익혀 주는 시간인 것이다.
이제는 나의 인생에서도 웬만한 모든 것들을 품어 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에 차갑게 변질시키는 것이 아니라, 속에 간직한 은은한 뜨거움과 온기로 사람도, 일도 있는 그대로를 품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돌아보면, 지난날의 뜨거운 열정도 아름다왔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은은한 불씨로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는 지금이 더 좋은 것 같다. 오랫동안 소중한 불씨를 꺼지지 않고 잘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모닥불 #박인희 #섬집 아기 #불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