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숙, <하이어셀프>
우리는 너무나도 애쓰며 살아간다...
문득 지난날들을 되돌아본다...
철들기 시작한 이후 '하고 싶은 것' 보다는 '해야 하는 것'들로 가득 찬 나날이었다. 첫째로서, 아들로서, 학생으로서, 사회인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조직의 리더로서... 그동안 나를 움직이게 한 역할들을 일일이 열거하기도 숨이 가쁘다. 사회인이란 한 단어만이라도 풀어헤쳐보면 얼마나 많은 '해야 하는 것'들의 종합선물세트였었나?...
나는 이러한 수많은 역할들을 나의 '정체성(Identity)'이라 생각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늘 '가면(Persona)'을 쓰고 있는 나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목마름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역할들을 하는 과정은 편안함, 행복감, 만족감보다는 항상 부족함, 더 나은 결과를 위한 몸부림, 안주하기보다는 또 새로운 목표를 갈구하는 나의 모습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은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의 '열등감'이 지배하던 시절이었고, 역설적으로 이 열등감이 삶의 추진력이 되었던 탓에 '부정적 감정'들이 일상이 되어 있기도 했었다.
김현숙 교수는 이처럼 삶에서 겪는 부정적 감정들이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하나의 '드라마'로 만들고 있는지 설명한다. 내면의 자신을 찾지 못하고, 외부로 드러난 자신의 다양한 모습의 굴레 속에서만 끊임없이 애를 쓰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드라마'로 비유하였다. 그런 우리의 인생의 드라마를 '부정적 감정의 에너지場'이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겉사람'속에서 끊임없이 애쓰는 우리의 삶은 '깨진 독에 물 붓기'처럼 근본적인 삶의 변화와 개선이 어렵다.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혀 과거의 상처와 현실의 부족함만을 곱씹는 행위는 나의 귀중한 에너지만 소모시키면서 자기 자신을 '환경의 희생자'로 만들어 버릴 뿐이다. 개인의 한층 더 높은 성장을 위해서는 부정적 생각의 악순환을 끊고, 새로운 시각을 가지는 일이 필수적이다. 그녀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러한 시스템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고는 과거에 발생했던 사건이 다시금 삽시간에 내 삶을 지배하도록 허락하고 환경의 희생자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때로는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즉각적인 보상을 '행복'으로 착각하고 살아간다.
우리의 '겉사람'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많은 문제로부터 잠깐 회피한 채 얻는 즉각적인 만족(예를 들어 게임, 쇼핑, 폭식 등)을 행복이라 착각하고 살기도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장기적으로는 목표와 성장의 방향 상실을 불러오는 위험이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불편함을 마주하고, 기꺼이 감내하는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녀는 "우리는 때로 불편함 없이 얻는 작은 즐거움을 행복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라고 즉각적인 만족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모습을 경고하고 있다.
뚜렷한 삶의 비전이 없는 상태가 얼마나 우리의 삶을 표류하게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 또한 오십 중반이 넘었지만 그동안 회사 내에서의 승진 목표 外, 뚜렷한 나의 인생 비전이 무엇인지 아직 자신 있게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 부끄럽기 그지없는 마음이다. 젊은 사람은 젊어서부터, 나처럼 중년의 나이는 앞으로 남은 인생을 위해 지금부터라도 나의 삶의 진정한 방향이 있는지 곱씹어 보고, 없다면 제대로 설정해 보는 것이 진정한 성장의 출발점임을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녀는 "나는 지금, 진짜 나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애쓰고 지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비전의 부재'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애쓰지 않고도 당당하게 살아가기
세상의 모든 변화가 쉽지 않듯이, 우리가 삶에 임하는 자세를 변화시킨다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아인슈타인은 "변화를 원한다면 즉, 문제의 솔루션을 원한다면, 문제가 발생된 의식과 같은 수준의 의식에서는 결코 변화를 창출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경영의 구루, 피터 드러커 또한 " 오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어제의 의식 수준에서 어제의 생각으로 해결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태도를 바꾼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는 변화가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반쪽, 즉 내면의 존재를 찾아내는 일이다.
분석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의인 칼 융(Carl gustav Jung)은 창조주가 태양의 빛을 모두에게 주었듯이 모든 인간의 내면에도 신성한 '빛'이 있다고 설명하고 이 빛을 "Self"라 칭하였다. 현대 영성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인 에카르트 톨레(Eckhart Tolle)는 인간의 내면의 존재를 '우리 안에 거(居)하는 거대하고 측량할 수 없고 파괴할 수 없는 신성하고 온전한 존재'라 칭한다. 인간을 지칭하는 'Human Being'의 'Being'에 해당하는 내면의 존재, 바로 이 존재가 "Higher Self"이다.
우리 내면의 존재, Higher Self는 새로 만들어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미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최근 여러 가지 배경하에서 다양한 형태로 구현되고 있는 명상(Meditation)의 본질이 바로 이 내면의 존재에 다가서는 것이기도 하다.
김현숙 교수는 "우리가 잊어버리고 살고 있는 우리의 Higher Self를 끄집어내고, 겉사람과 함께 잘 융합되고, Higher Self를 전면에 내세워 살아갈 때 진정한 성장의 방향으로, 너무 애쓰지 않고도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들이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복잡하거나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나는 늘 삶의 과정에서 부딪히는 모든 문제들에서 그 이면의 '의미'를 찾았고, 찾은 그 의미를 따라가면서 살아왔다. 내면의 존재, Higher Self라는 것을 알지도 배우지도 못한 채 말이다. 바로 늘 문제의 '의미'를 찾던 성찰의 존재, 그 모습의 나가 바로 Higher Self였던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항해로 종종 비유하곤 한다.
항해는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방향을 설정하고 그곳으로 향해 가는 여정 자체가 목적이다. 항해가 고통이 되는 이유는 목적지에 집착하여 항해 과정에서 만나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환경과 조건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바람의 방향, 바람의 세기, 해류 상황 등 자연의 힘이 자신의 예상과 같지 않다고 탓만 하면 파도에 휩쓸릴 수도 있다. 바람이 불어 주지 않아 항해를 할 수 없을 때는 돛을 내리고 잠시 쉬어가면 된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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