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장사의 시작 008) 나의 평강공주
24살6월 드디어 2년 6개월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을 했다. 전역을 하는날 함께 고생한 군대 동료들과 인사를 나눈고 위병소밖을 나오는데 강원도 산골의 아침 공기라 그런지 안개가 자욱했다. 말년백을 어깨에 한번더 걸쳐 매고 아무것도 없는 빈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정말 주머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빈손으로 다시 제2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장사를 할 수 있는 일터가 있었고 부자가 되겠다는 나의 꿈은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다. 전역 후 일터에서 특별한 인연이 시작되었다. 당시 사장님께서는 동성로 시내에 여러 매장을 운영하셨는데 그중 내가 군입대하기전에 근무했던 쥬얼리 가게에서 일하던 여자 직원에 호감이 가기 시작했다. 쥬얼리 가게에서는 귀를 뚫어주는 일이 많았는데 그중 귀의 윗부분이나 귀안쪽 오돌뼈부분에 뚫는 것은 경력자들에게도 난위도가 꽤나 놓은 것이라 가끔씩 옷가게에서 일하는 나를 호출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다. 군대가기전 쥬얼리에 근무할 때 난위도 있는 부위에 귀를 뚫는 일은 나의 전담이었기 때문에 수월하게 일을 도와주고 나의 매장으로 복귀하곤 했다. 일을 도와주고 난 뒤에는 천사 같은 미소로 음료수를 건네며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당시 연예를 하지 않고 일에 집중하려고 다짐을 했지만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유일한 부분이 남녀간의 사랑인 것 같았다. 그 후 몇 번의 용기 있는 데이트 신청으로 우리는 만남을 자연스럽게 이어갔다. 나는 당시 오토바이로 출퇴근을 했는데 여자친구를 오토바이로 집에 데려다 주는 일은 무척이나 위험한 것 같아 늘 아쉬움을 달래며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곧장 헬스장으로 가서 운동을 하는 것이 나의 일상의 루틴이었는데..운동을 마치고 헬스장을 나오면 여자친구는 항상 출입구 계단에 걸터앉아서 나를 기다리곤 했다. 그녀의 손에는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음료두개를 들고 있었다. 운동이 끝날 때 쯤이면 버스가 끊기는 시간이라 어쩔 수없이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여자친구의 집으로 태워주었다. 나는 그때 월급의 70%를 적금을 하였고 고정지출을 빼면 데이트를 할 수 있는 여유돈이 없었다. 여자친구도 어려운 집안이라 생활비를 보테야 했기에 넉넉지 않은 용돈으로 생활을 해야 했다. 우리의 데이트 장소는 늘 공원이었다. 공원에는 돈이 들지 않고 언제든 개방이 되어있어 우리에게는 너무나 적합한 데이트 장소였다. 봄여름 가을 까지는 공원에서 데이트를 하는 것이 너무나 좋았지만 겨울에는 늘 두툼한 무릎담요를 오토바이 수납공간에 챙겨두고 아내와 함께 덮고 공원에 앉아서 데이트를 했다. 지금생각해보면 여자친구에게 너무나 미안한 기억중 하나이다. 남들 흔히 하는 카페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편안하고 멋진 데이트를 할 수도 있을련만 늘 돈을 모으느라 제대로된 좋은 데이트를 해주지 못했다. 공원의자에 앉아 여자친구는 나의 손톱을 늘 점검해주었고 여자친구의 눈에 조금 거슬릴때면 가방에 늘 가지고 다니던 손톱깎기를 꺼내서 나의 손톱하나하나를 정리해주었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나의 손을 마사지 해주며 나의 지친영혼을 충전해주었다. 그리고 하루 중 고객응대 했던 이야기를 하면 여자친구는 늘 정말 어떻게 그런 장사를 할 수가 있냐면서 엄지척을 해주며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며 대단하다는 찬사를 보내주었다. 아무것도 아닌 말에도 나는 여자친구에게는 늘 영웅이었다. 그리고 집에 데려다 주고 헤어지기 전에 꼭 가슴을 맞대고 오늘 하루도 고생했다고 인사를 하고 군인처럼 필승경례를 하고 데이트를 마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습관처럼 “ 나는 반듯이 성공한다! 우상권 할수있다!를 수없이 소리치며 오토바이로 한산한 새벽길을 달리며 집으로 왔다. 두툼한 헬멧을 쓰고 소리치면 나에게만 들린다. 누군가 성공을 꿈꾸며 열심을 다해서 살아가는 오토바이타는 독자분들이 있다면 헬멧을 쓴 채로 자기다짐을 소리를 질러 보라고 해주고 싶다. 스스로에게만 들리는 자기 확언은 반듯이 자신의 꿈을 이루는데 커다란 힘이 되어줄 것이다.
휴무 날이면 나는 데이트 시간보다 항상 한두시간 일찍 가서 근처 교보문고에 가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들고 빈자리에 걸터 앉아 읽었다. 그리고 데이트 시간이 되면 아내를 만나 데이트를 하곤 했다.
군대 전역 후 나의 다짐 중 첫 번째는 가장 일찍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 되자는 각오였기에 늘 잔업이 있다고 지원자를 받으면 언제나 가장 먼저 하겠다고 지원을 하였고 잔업이 있을때마다 여자친구는 늦은 시간동안 pc방에서 나를 기다렸다. 잔업이 끝나고 여자친구가 있는 pc방으로 달려가면 아내는 하루종일 일을 하고 나를 기다리는것이라 pc방 책상에 업드려 잠에 들어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어깨를 조심스레 흔들어 깨우고는 오토바이를 타고 집에 데려다 주었다. 먼저 집에 가라고 해도 단 한 번도 먼저 간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라는 사람이 뭐 길래 이토록 나를 믿고 기다려주고 나를 사랑해주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힘없고 백 없는 내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라고 확신했었다. 여자친구를 위해서도 나는 더욱 열심을 다해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군 시절 결혼할 사람이 생기면 선물로 주고 싶어서 시간날 때마다 틈틈이 만들어 완성한 나무판이 있었다. 길이가 가로 50cm 세로30cm정도 되는 나무판을 곱게 갈고 갈아서 나무판위에 글자를 새겼다. 지금생각하면 너무나 유치한 말이지만 나의 진심이 가득 담아둔 글이었다. “ 너를 위해 살겠노라!”라는 말이다. 결혼이라는 것은 상대를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첫 번째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글씨하나하나를 조각칼로 새겼다. 사실 지금 보면 너무나 부끄러워서 볼 때마다 손이 오글거린다. 하지만 늘 그렇듯 지난과거를 되돌아보면 늘 아쉬움이 남고 촌스럽고 부끄러운 것이 많은 것 같다. 글씨를 모두 정성스럽게 파고 그 위에 또다시 곱게 갈고 갈아서 부드러운 나무위에 글씨가 완성이 되면 토치로 나무의 겉 표면을 태워서 나무의 결을 살려내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니스를 칠해서 코팅처리를 했다. 그렇게 완성된 “너를위해 살겠노라”의 나무판은 머지않아 프로포즈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여자친구와 만난지 300일이 되던 해에 나무판이 들어갈 커다란 선물상자를 구하고 그 안에 나무판과 안개꽃을 풍성하게 담아두고 맨 위에 결혼을 하자는 편지를 얹어 두었다. 그리고 프로포즈를 하기로한 당일 시내사장님께서는 새로운 매장오픈을 준비하느라 잔업 할 멤버가 필요했고 나도 모르게 지원하여 잔업을 하게 되었다. 그날도 여김 없이 나를 기다리는 장소가 되어버린 늘 가던 pc방에서 나를 기다렸고 작업을 마치고 너무나 미안한 마음에 뛰어가 잠든 여자 친구를 깨우고 예약한 장소로 갔다. 지금생각하면 모든 것이 최악의 프로포즈였다. 하지만 여자 친구는 너무나 좋아했고 그때 받은 나무판을 아직도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렇게 어설픈 프로포즈를 하고 그 다음날부터는 마치 부부인마냥 서로를 위해서 아낌없이 헌신하며 지냈던 것같다.
너무나 맑은 하늘아래 우리는 늘 그랬던 것처럼 공원에서 자리를 잡았다. 결혼에 대한 행복한 환상에 빠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여자친구의 전화벨이 울렸다. 그리고 여자친구의 언니가 다급한 목소리로 빨리 집으로 오라고 했다. 다급히 집으로 데려다 주었고 그날 저녁 늦게 여자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여자친구의 아버지께서 위암 말기라고 하며 흐느끼며 말했다. 한참을 말없이 생각했다. 어떠한 말로도 위로가 않될 것을 잘 알기에 그냥 침묵보다 더 나은 말을 생각해봤지만 없었다. 너무 많이 울어서인지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 여자친구의 음성이었다. 일단은 쉬라고 하고 전화를 끊고 나도 한참을 울었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울면 나도 함께 영문도 모른 채 슬펐고 따라서 눈물이 났던 것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너무나 슬픈 일이 일어났고 눈물을 흘리는 것에 나도 함께 슬펐고 눈물이 났다. 그리고 평소 여자친구를 데려자 주면서 마주치면 인사정도로 하던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셨고 여자친구인 이름인 ○○를 사랑 하냐고? 진심으로 사랑 하냐고? 결혼을 할건지? 등등 꼬치꼬치 나의 진심을 확인하셨다. 그리고 두 손 잡으시고 ○○한테 다정다감하게 잘해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어릴 적 버스운전을 하시다 허리를 크게 다치셔서 일을 못한지 오래되어 어머니께서 생계를 책임지다 보니 막내딸인 ○○에게 제대로된 메이커 운동화 한 컬례 못 사준 것이 너무나 후회스럽다고 하셨다. 그날은 아버님께서 식구들을 모두 모아두고는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꼬치꼬치 딸4명옆에 앉아있는 남자들에게 물으시고 확인하셨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에게도 역할이 생겨났다. 딸만 4명인는 터라 아버지를 모시고 목욕탕에 갈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아버님의 몸은 점점 야위어 갔고 나는 휴무날이면 야윈 아버님을 오토바이 뒤에 조심스레 태우고 목욕탕에 가서 아버님의 몸에 때를 밀어드렸다. 목욕탕에 가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아버님의 몸은 더욱 야위어 갔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5층이라 늘 업고 계단을 올랐는데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에 나마음도 씁쓸하고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어느 날 4명의 딸 중 첫째 딸만 결혼했었는데 큰 형님께서 여름에 다함께 가족여행을 갔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했다. 모두가 알고있었다. 아버님과 함께 보내는 마지막 여름이라는 것을 서로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알고 있었다. 약속의 날이 되어 포항 바다근처에 있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으로 갔다. 하늘도 맑고 물도 맑고 조카들과 4명의 딸들과 예비 사위들이 함께 즐겁게 물놀이를 하며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 그늘 한켠에 파라솔을 치고 편안한 의자에 아버님을 모셔두고 우리는 그렇게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모두가 아버님을 위해서 여행을 온 건지 우리가 즐기러 온 것인지 착각이 들 도로 재미있는 게임을 하며 놀았다. 웃음이 넘쳐나고 서로 짓꿋은 물장난을 치고 튜브에 들어간 조카들은 우리들이 보호아래 물장구를 치며 신나게 놀았다. 그리고 아차 싶어서 아버님을 보았는데 아주 많이 피곤해 보이셨다. 꾸벅꾸벅 조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잠이 와서가 아니라 정말 힘이 없어 보이셨다. 큰 형님께서 다같이 숙소로 돌아가자고 제안하셨고 우리는 모두 짐을 챙기고 바다가 보이는 예약해둔 숙소로 갔다. 그리고 간단하게 식사를 먹고 모두가 아침일찍 서둘러 온 탓과 물놀이를 열심히 한 탓에 너무나 피곤한 나머지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잠들어있는데 어머니께서 모두를 깨우셨다. 어머니께서 화장실에 들어가셨다가 쓰러져있는 아버님을 발견한 것이다. 황급히 119를 부르고 의식이 없는 아버님을 애써 깨우려고 모두가 애썼다. 119가 도착을 하고 병원으로 이송이 되어 의사는 기계음이 들리는 심장 충격기를 몇 번을 시도하고는 사망선고를 하셨다. 그렇게 아버님은 세상을 떠나셨다. 여행을 함께갔던 멤버 모두가 장례식장에 다시 모였고 우리는 그렇게 한식구가 자연스레 되었다.
지금도 아내는 그때를 회상하며 나에게 고마움 표시를 한다. 딸밖에 없어서 아버지가 아프시고는 목욕탕에 가는 것이 가장 걱정이었는데 내가 선 듯 나서서 하겠다고 하니 너무 고마웠다고 한다. 나에게도 지금은 그때의 아버님과의 목욕탕 추억은 잊을 수가 없다. 장인어른과 함께 한시간이 너무나 짧은 시간이라 특별히 효도한 것은 없지만 아내는 늘 나에게 그때의 시간을 회상하며 고마운 마음을 표시 낸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흘러 나에게도 사장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났다. 당시 내가 점장으로 있었던 디○브랜드가 지속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전국 여러 곳에서 오픈문의를 본사에 요청을 했고 오픈을 하게 되었다. 그중 대구 수성구 맨 끝에 있는 소도시에서 브랜드 매장을 운영하시는 사장님들이 디○즈 브랜드를 하려고 본사에 요청을 한 것이었다. 요청한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매장이 우리 동성로 매장이었고 본사 대표님께서는 우리가 그곳에 추가 오픈을 하는 것을 희망하셨다. 시내 사장님께서는 서둘러 나를 불러서 면담을 하셨다. “ 상권아 니가 대구 수성구에 있는 어느 상가에 들어가서 디○즈 브랜드를 오픈해보는 것은 어떻겠노?”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 제가요? 저는 아직 준비가 .....?”라며 말을 우쭐이며 자신감 없는 말투로 대답을 했고, 사장님께서는 자금이 부족하면 내가 도와 줄 거니깐 걱정 말고 시작해보라고 하셨다. 사장님 말씀에 용기를 얻게 되었고 함께 오픈 예정지인 그곳에 시장 조사를 해보러 가기로 했다. 시내에서 각자의 오토바이를 타고 사장님과 나는 서로 손짓을 주고 받으며 조심스럽게 수성구 맨 끝동네에 도착을 했다. 그리고 동네를 돌아보는데 정말 브랜드가 몇 개 없는 한산한 동네였다.
그렇게 동네를 돌고 있는데 광장이라는 곳에 들어섰는데 중 고등 학교학생들이 빽빽이 그곳을 채우고 어느 곳에서는 농구를 하고 어느곳에서는 밴츠에 앉아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어느 곳에서는 서로 가방을 던지며 장난치며 놀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냥 자신 있었다. 그 당시 디○즈 라는 브랜드가 1020세대에게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1020세대들이 밀집된 곳이라는 확신에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이리저리 걱정보다 그냥 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장님께 해보겠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리고 그날 바로 여자친구집에 들러서 어머니께 큰절을 했다. 갑자기 절을 하는 나를 보고는 어머님께서는 왜그러냐? 무슨일 있는냐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으셨고 나는 여자친구와 함께 우리의 정해둔 계획을 차근차근 말씀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도 있었지만 우리의 계획을 믿고 허락 해주셨다. 장사도 장사이지만 나도 여자친구도 본집과 오픈할 매장이 거리가 멀어서 함께 동거를 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큰 이슈였고 어머니께 동거에 대한허락을 받는 것이 가장 큰 숙제였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차근차근 말씀 드린 것에 또 한번 믿음을 주셨다. 나도 어머니께 약속드린 것이 있었다. 동거로 시작하지만 1년안에 전세 아파트를 얻는 것과 결혼식을 올리는 약속이었다. 어쩌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고는 그렇게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허락 받은지 1달 안에 동거할 곳을 정했고 매장계약도 동시에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도전이었다. 나와 여자 친구가 아끼고 아껴서 모은 전 재산을 모두 투자해서 시작하게 되는 우리의 인생에 첫 가게를 오픈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매장계약을 한지 1개월이 지나 드디어 모든 오픈준비를 마치고 첫 가게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