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학교 점심이 맛없대서, 도시락을 싸달라고 아우성을 쳐서, 장조림을 한다고 새벽 4시 반에 일어났다. 할 일이 있으면 잠이 안 오는 ENTJ의 숙명이다. 그런데 감기 때문에 컨디션이 안 좋은 둘째가 엄마가 옆에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꼭두새벽부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같이 자고 있던 첫째가 깰까 봐 나무랐더니, 늑대인간이 출현했다. 돌고래라고 해야 하나. 아! 돌고래 소리를 내는 늑대인간이 적절하겠다.
나는 왜 장조림을 했을까? 뭐가 잘못된 걸까? 왜 둘째는 이렇게 계속 화만 내는 걸까? 독일에 오지 말았어야 하나. 아파서 불쌍한 애를 받아주는 건 대체 어디까지 해야 할까. 이러다 버릇없는 아이가 되면 어쩌지. 맹모삼천지교를 꿈꿨거늘, 내 아이는 왜 이렇게 소리지르고, 때리고, 던지는 걸까? 나는 엄마로서 자격 미달인가.
아파서 울고, 화나서 울고, 엄마한테 혼나서 울어서 퉁퉁 부은 아이 눈을 보니 가슴이 메어지고 너무나 미안하다. 그런데 혼내 놓고 또 미안해 하면 안될 것 같아서 어금니 꽉 깨물었다. 아침부터 너무 속 시끄러운 하루였다.
하루종일 동분서주 우왕좌왕 엉덩이 붙일 새 없이 일만 하는데, 초기정착민의 삶은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초기정착민의 삶은 전쟁난민과 다름없다. 귀신의 집이 내 인생에 대한 대규모 공습이라면, 아이의 열감기는 언제 어디서 터질 지 모르는 지뢰고, DHL은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는 게릴라 같다. 1주일에서 10일 걸린다던 항공특송은 올 듯 말 듯 사람 피를 말린다. 날씨는 봄인데, 내 옷은 언제 오나. 신발 한 켤레로 3주를 버티고 있는 실정이다. 매일 오후 2시경에 오던 DHL이, 아이 병원 데리고 간 사이에 왔다 갔다. 한여름 잔뜩 약 오른 청양고추처럼 분노게이지가 풀만땅 가득 찼다. 작정하고 사람 약 올리나? DHL은 인류의 발암물질이다. 병원에서 그리 심각하지 않대서 늦게나마 아이를 학교 데려다 줬더니, 학교에서 열 나서 조퇴당했다. 내일 학교 오지 말란다. Are you kidding me?!
화창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황야요 그대 노 저어 가오… 열감기로 학교도 못 간 놈이 놀이터에서 형아 친구들과 깔깔깔 웃으며 뛰어노는 모습을 보니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온다. 내 속으로 낳았지만 저 놈은 진짜 요물덩어리야. 쓰디 쓴 하루를 되새김질하고 있는데, 또 구원의 손길이 다가왔다.
첫째 친구의 엄마가 같이 기다리자며 말을 걸어왔다. 이야기를 하면서- 귀신의 집이나마, 연고지가 있었던 내 초기정착과정이 다른 사람은 누릴 수 없었던 수혜였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귀신의 집이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는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불을 부칠 곳이 없었기 때문에, 초기에 침대도 없이 이불도 없이 잤다는 슬픈 전설이… 그리고 남들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는 행정절차도 주소지가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오버우어젤 학교 가까운 곳에 집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라는 것을, 나는 경험해 본 적 없지만 그 악명이 자자하신 ‘독일에서 집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상기시켜 주었다.
그녀는 독일에서의 내 첫 출발이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라고 말해준 은혜로운 사람이었다. 아침부터 반복된 각종 좌절감에 지쳐 있던 내게, 단비같은 시샘을 내려주었다. 그래, 감사해야지. 학교 가까운 곳에 집도 있고, 좋은 이웃도 생겼고, 차도 샀고, 벌써 비자인터뷰 잡혔고, 주말에 뭐할지 생각하는 여유도 생겼는데 그만 불평하자.
집에 와서 삼겹살 수육을 1.5킬로 삶았다. 옆집에 한 접시 갖다 주었다. 나쁘지 않은 수육인데, 마침 김홍도 그림이 그려진 접시가 있어서 안성맞춤이었다. 그래, 고마운 사람들한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도 하면서 힘내 보자!
남편이 집에 와서 점심에 만난 우리은행 사람들 이야기를 해 줬다. 바레인 지점에 있던 사람들이 공습으로 피난 왔단다. 두바이 지점 사람들은 인도로 피난 갔단다. 가족은 한국으로 귀국하고 아빠는 독일 민박에서 묵으며 일하고 있단다. 바레인에서 폭탄 터지는 걸 두 눈으로 봤단다. 난 내가 전쟁난민과 다름없다고 생각하며 하루를 보냈는데, 갑자기 분위기 진짜 전쟁이다. 어머 무서워라. 나를 위협하는 거라고는 짜증나는 DHL과 주차위반 단속딱지 뿐인 독일에서 전쟁난민인 척 한 내가 부끄러워졌다.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하며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