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만에 운동이란 것을 했다. 한국에서 팔자 좋을 때는 일주일에 2번~3번 테니스 치고 2번씩 개인코치님과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다. 독일에 간다고 하니, 오랫동안 나를 봐주신 개인코치님은 ‘혼자 운동할 수 있도록’ 나를 프로그래밍한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시고 열성을 다해 가르쳐주셨다. 하지만 그 동안 코치님과 운동하는 데 익숙해진 나는 자신이 없었다.
한 달 동안 유목민 생활을 하는데 얼굴이 자꾸 포동포동해지고, 허릿살이 두툼해지는 게 느껴졌다. 개고생하는데 왜 살은 찌는 걸까? 정말 너무 억울하다. 남편은 ‘고생하는데 먹는 낙이라도 있어야지. 먹어, 먹어!’라고 말해준다. 맞아, 나 고생 중이야. 하면서 맛있는 우유랑 요거트랑, 버터랑, 치즈, 고기를 먹어댔다. 하지만 호빵맨 사진을 보니 위기감이 엄습한다. 3개월 후에 도착할 체중계가 두렵다. ‘이건 그냥 부기야. 체중계에 올라가면 오히려 빠져 있을지도 몰라’라는 현실도피망상에 젖어보지만, 이대로는 파국이다라는 본능적 예감이 더 강하게 엄습했다.
그리하여, 운동을 재개헀다.
학부모들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학교 Gym에 가 보았다. 빌더바디에서는 나랑 코치님만 하니까 시설이 깨끗하고 향기가 좋았는데(빌더바디를 선택한 중요한 이유였다), 일단 냄새가 쿠리쿠리하다. 다른 사람들도 있고 하니 좀처럼 집중이 잘 안된다. 데이터 다운로드도 느려서, 코치님이 보내줬던 영상들이 자꾸 버퍼링 걸린다. 옛날에 공부 좀 하려면 책상 청소하고 싶듯이, 세팅이 영 마음에 안 든다.
옛날에 날라리들이 모처럼 공부한다고 폼 잡고 영어 좀 깔짝, 수학 좀 깔짝, 국어 좀 깔짝깔짝 대듯이…나도 깔짝거렸다. 엉덩이 운동도 깔짝, 매달리기도 깔짝, 팔굽혀펴기도 깔짝… 기구들도 한 번씩 해 보고… 그런데 완전 탄탄한 몸매의 백인 여성이 보라색 옷을 입고 나타나, 음악을 들으며 묵묵히 자기 루틴을 시작했다. ‘와, 잘한다…’ 오늘 내 운동량을 달성한다는 목표로 저렇게 자신있게 운동하는 나의 모습이 우리 코치님의 목표였는데. 코치님하고 했던 운동들이 왜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걸까? 코치님하고 할 때는 이거는 간단해서 집에서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보라색 여자는 그 날 공부할 양을 정해놓고 해치우던 그 옛날의 나였다.
나이를 먹으면 이해심이 많아진다고, 못하는 운동을 해야 하는 40대가 되니, 학창 시절 공부 못하던 애들을 이렇게 이해하게 된다. 깔짝깔짝대니 집중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1시간만에 퇴각했다. 그래, 시작한 게 어디야. 뭐, 좀 먹을까봐.
옛날에 공부할 때도 선생님하고 같이 풀면 잘 풀리는데, 혼자 풀면 안 됐었지. 비싼 개인과외를 받다가 갑자기 종로학원에 와서 대형강의 받는 기분이랄까.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내던져진 존재’라고 했었는데, 지금 내가 딱 그런 기분이다. 이 외로움, 이 무력함, 이 허무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코치님한테 메시지를 보냈더니, 다정하게도(원래 안 다정한데) 매일 조금씩 계속 해보라고 격려해주신다. 옛날에 수학 선생님처럼, 넌 할 수 있어! 라고.
운동에서 실존주의로, 그리고 아이들로 생각이 흘러갔다. 학교에서 영어로 나눗셈을 배우고 있는 첫째의 마음이 이런 거겠지. 생판 모르는 나라에 와서 영어를 익혀야 하는 아이들도 얼마나 포기하고 싶을까. 첫째, 둘째는 국제학교에 ‘내던져진 존재’다. 엄마아빠가 갑자기 독일 가자고 하더니, 말도 안 통하는 학교에 보내놓고는 ‘행복한 줄 알라’고 한다. 선생님이 하라고 하니까, 친구들이 하니까, 주어진 과제를 풀고, 눈치껏 생활해보지만 혼란스럽다. Gym에 던져진 나처럼. 저 애는 영어를 저렇게 잘 해서 좋겠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자신 없고 걱정스럽고 도움이 필요한데 선생님은 바쁘다. 혼자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자율학습, 누구나 다 하지만 제대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궁극의 경지. 나는 이제 그 자율학습을 운동에서 해내야 한다. 코치님이 없어도 혼자 식단조절을 하고, 근력운동과 유산소운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 공자님이 말씀하신 평생학습의 깊은 뜻이 이제야 비로소 뼈에 사무친다. 코치님 없이도 매일매일 운동을 해야 건강하고 행복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나는 아이들의 코치님이 되어야 한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입이 아프도록 설득해야 한다. 다소 과장된 칭찬도 해주고 필요할 때는 채찍질도 하면서, 때로는 떠먹여 주기까지도 하면서, 아이들이 공부를 포기하지 않도록,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들며 코칭해야 한다. 운동에 대해 질문이 있을 때 빌더바디 코치님이 흔쾌히 대답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 엄마도 아이들에게 그런 코치가 되어야 하는 거겠지. 내가 도와줄게, 하지만 결국 너는 혼자 해나갈 수 있어야 해.
옛날에 무협만화에 그런 말이 있었지.
“이제 하산하거라. 나는 너에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
나와 우리 아이들이 자율학습의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하산할 수 있도록,
오늘 하루도 포기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