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 잘 지내!

by 고도리 햇반

<서부전선 이상 없다>라는 독일 소설이 있다.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대충 내용은 안다. 어린 학생이 전쟁터에서 어찌저찌 버티다가 허무하게 죽지만, 그 전선에 대한 그 날 보고는 이상무였다. 지금 내가 딱 그렇다. 사람들이 “잘 지내?” 그렇게 물으면 “잘 지내!”라고 답하지만, 사실 나의 독일전선에는 이상이 많다.


독일에 온 지 6주차. 지금까지 형성된 주요 전선들만 살펴봐도 다음과 같다.


-모서비스 전선: 친환경페인트 11통에 대해 1000유로를 청구해서, 우리가 그렇게는 못 준다고 버티고 있다. 어차피 페인트칠하는 사람 오는 거였는데, 친환경페인트를 뭐 색다른 도구로 칠하는 것도 아닌데 어처구니가 없다. 한국업체가 외국인업체(모로코1)한테 재하청을 주는 형식인데 일처리도 지저분한데다가 인터넷에 페인트값 다 나오는 데 뻔뻔하기 그지 없다.

-에어비앤비 전선: 우리가 사택에 입주하기 전에 10일 정도 머물렀다. 깨끗하고 편리해서 좋았다고 생각하며 체크아웃했는데, 식기세척기를 우리가 부서뜨렸다고 800유로를 내란다. 우리가 식기세척기를 망가뜨렸으면 소리가 낫겠지...우리가 알았겠지. 에어비앤비는 정황 상 우리가 물어내야 한다고 한다. 남편은 해외결제를 차단해버렸다.

-보다폰 전선: 악명 높은 보다폰을 결정한 우리가 잘못했다고 뼈 아프게 반성 중. 역시 명성은 괜히 자자한 게 아니다. 휴대폰과 케이블인터넷을 한 큐에 처리해버릴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가 계약한 보다폰. 그러나 데이터품질 형편없고, 케이블도 끊기고 난리 부르스다. 비싼 가격에 이 지랄이니 못 참겠다 계약해지한다고 가게도 쫓아가고 메일도 보냈다. “고객센터 전화해봤자 어차피 독일어라 너는 못 알아들어라”고 말하는 무례한 가게점원(모로코2)이나 “24개월 계약인 거 너가 알고 했으니 취소 안된다”라고 답변하는 고객센터나 한통속이다. 갑자기 내가 사랑했던 쿠팡이 생각나네. 여기는 한 달에 정기적으로 돈을 뜯기고 있으니 우리가 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쯤해서 10일 전쯤 형성되어 오늘 소멸된 운동화전선을 살펴보자.


2월 17일에 독일에 도착해서 털신 하나로 한 달을 버텼다. 장화랑 눈신발 등 쓸데없는 신발만 갖고 온 것이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3월 20일에 큰(?)마음 먹고 구입한 뉴발운동화. 사이즈가 없어서 집으로 보내달라고 했더니 3일 걸린단다. 결제하고 기분 좋게 집에 왔는데 이노무 운동화가 감감무소식이다. 이상하다? 독일인 거 감안해서 5일 후 전화했더니 가게에서 돌아오는 답변은 네가 전화해보라는 것이다. 전화해봤지. 온통 독일어라 못 알아먹고... 또 기다렸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안 오길래 다시 가게에 전화했더니 매니저라는 여자가 “It’s not my problem”이란다. 독일 와서 자주 열리던 뚜껑 또 열렸다. 내가 성격이 나쁜가?? “I am kindly helping you, why are you yelling?(내가 친절하게 도와주는데, 너는 왜 소리를 지르니?)”란다. 와...너 지금 나 맥이는 거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런 영어가 생각이 안 났다. 환불해달라고 했더니 쿨하게 그럼 오란다.


그래서 오늘 쫓아갔다. 매니저 나오라고 했더니 아주 예쁜 모로코계 여자가 나왔다. 부글부글하는 눈으로 노려보며 환불해 달라고 했더니 세상 천천히 전화를 걸어댄다. 사람 약오르게 하는 법을 엄마가 저렇게 가르쳐줬나? 아니면 모로코 문화인가? 이쯤 되니 모로코가 싫어진다. 한참을 통화하더니, “환불해주고 싶은데 내 상사가 전화를 안 받아. 12시에 다시 올래?(당시 시각 11시50분)” “너가 매니저라며” “아, 내가 매니저인데 환불해주려면 나보다 더 상사한테 허락을 받아야 해.”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꾹 참고 점심 먹고 오겠다고 후퇴했다. 그러나 어영부영 식당 찾다보니 10분이 지났고, 밥이 목구멍으로 안 넘어 갈 것 같아서 12시에 다시 갔다. 느릿느릿 기어 나오더니 한다는 말이, “내가 지금 확인해보니 오늘 아침에 발송됐대. 그래서 환불해줄 수 없어.” DHL(여기서 또 어김없이 등장)이 모종의 이유로 오늘에서야 내 운동화를 보냈다며 당당하게 운송장 기록을 보여준다.


하지만 나는 이미 화가 마니마니 났기 때문에 너를 그냥 이렇게 보내줄 수 없단다, 이 년아.


“알았으니 네 상사하고 통화할게” 그랬더니 이 모로코년(사실 모로코라고 확인된 바는 없다)이 “Oh, my God”이라며 눈을 굴린다. 어디서 눈을 굴려?!


이럴 때 쓰라고 나는 영어를 배운 것이다. 내가 이 년한테 당하고 집에 안 가기 위하여 밤마다 <프렌즈>를 그렇게 쳐봤나보다. 이미 그 가게의 여러 명의 직원들은 귀가 쫑긋해서 이 싸움의 추이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다. 손님들도 안 나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전화를 받은 상사에게 이 년의 죄를 낱낱이 고했다. “자기 문제가 아니래요. 그러면 누구 문제에요? 내가 여기서 샀으니, 보내주는 것까지 가게 책임이지요” 독일의 일문화인 것인지, 그 년의 직업정신인 것인지 나는 모른다. 하여간 “It’s not my problem”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그 년의 죄인 것이다. 상사는 상사답게 “I am so sorry”를 연발했지만 물건이 발송됐으니 하루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했다. 그래서 내가 내일도 안 오면 너한테 전화하겠다고 하고 전화번호를 땄다.


전화를 끊으니 매니저의 태도는 쿠팡 고객센터의 ‘고객님’ 모드로 바뀌어 있었다. 공손한 태도로 물건이 안 오면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 나에게 친절히 스펠링까지 적어주었다. 멍청하기 짝이 없다.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상사를 욕 보이고, 직원들 앞에서 쪽 팔리기 전에-고객님 불편을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태도를 보였으면 한국에서 날라온 내가, 물정 모르는 독일에서 이렇게 화를 냈겠니. 성격 안 좋은 고객을 못 알아보는 것만도 매니저 자격 없음이렷다. “알겠고, 나는 애들이 기다려서 이만,”하고 나왔다.


아이들하고 밥 먹고 동물원 갔다가 5시쯤 집에 오니 운동화가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내가 지랄한 게 독일에 소문이 퍼졌나???? 10일 동안 안 오던 운동화가 아침에 발송했는데 어떻게 오후에 와 있지??? DHL이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피해망상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든다. 독일 오면 여유가 생긴다던데, 나는 성격이 다시 나빠지고 있다.


오늘은 작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아직도 교착상태의 전선이 많다. 이제는 독일 소비자보호 센터에 메일을 날려야 하는데 전투력이 딸려서 잠시 휴전 중이다. 부디 제발 전투 없이 넘어갔으면 하는 프로젝트에 온 전력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귀신의 집을 수리하기 위해 독일판 숨고에 집수리를 의뢰하고 4군데 방문견적을 받았다. 일단 모로코는 제낀다. 동유럽과 독일 사람 위주로 견적을 받았고 이제 그 견적을 비교해서 집수리를 의뢰해야 한다. 내 집도 아닌데 내가 왜 이런 수고와 시간을 들이고 있는지 이불킥할 때도 있지만, 일이 있으면 잠이 안 오는 내 성격이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억울함은 꿀꺽 삼키고 일단은 눈탱이 안맞기에 집중해보자.

그렇다. 이렇게 살고 있는데, 누가 “잘 지내?”라고 물어보면 “잘 지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나의 고생담을 장황하게 늘어놓기도 미안하고, 독일에 간 내게 예의 상 물어봤는데 너무 TMI 제공하면 안 되니까, 잘 모르는 사람인 경우에는 초면에 불평 많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줄까봐, 이유는 다양하지만 “잘 지내!”라고 답하게 된다. 이 정도 고생이면 너무 초현실급이라 짧은 몇 마디로 형용할 수 없으니 “잘 지내”라는 자동응답으로 넘겨버리고 나 또한 현실을 초월해버리는 것이다.


고생할 줄은 알았지만, 이럴 줄은 몰랐어. 거울을 볼 때마다 못 생겨진 나를 보며 우울하다. 아들들이 “엄마 예뻐”라고 위로해주지만 우리 서로 알고 있자나 그거슨 사실이 아니야. 매일같이 벌어지는 각개 전투에 점점 더 억세지고, 강해지고, 뻔뻔해진다. 독일에 아이들 데리고 와서 요리력 살림력 업그레이드하고, 글로벌 전투력까지 장착한 아줌마가 되어 귀국하겠지. 우아하고 귀엽고 물정모르는 할머니로 늙고 싶었는데, 이번 생에는 글렀다.


내 안에 있던 우아함, 귀여움, 천진난만함은 독일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하지만 나의 독일 정착기는 대체로 “이상 없음”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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