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의 집에서 첫 날을 보내고, 첫째가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냉기가 도는 집에서 머리도 못 말리고 잠을 자다가 감기에 걸린 것이다. 40도 고열이다. 이고지고 온 해열제가 있긴 하지만, 겁이 덜컥 났다. 학교 잘 다니고 잘 먹고 잘 자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호텔에 있을 때는 멀쩡했던 아이가 사택으로 이사와서 아프다니. 화가 났다.
밤새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를 뜬 눈으로 간호하고, 아침에 긴급하게 병원을 수배했다. 독일은 한국처럼 그냥 문 열고 들어가는 시스템이 아니란다. 전화하면 자동응답기가 독일어로 쏼라쏼라할 뿐, 도무지 인간하고 대화할 수가 없다. Can you speak English? 를 할 상대가 안 나온다. 물어 물어 한국인 의사선생님이 하는 병원을 찾았지만 하필 문을 닫아서, 독일 선생님 병원을 찾았다.
독일말은 좀 무섭다. 한국말로 치면 경상도 사투리 느낌이다. 대신 그 재밌는 멜로디는 없고, 트트트 거센발음 대잔치다. 키는 또 얼마나 큰지. 꺼꾸리들이 업무적으로 트트트 해대면 낯선 곳에 온 한국 거지들은 더 주눅 들 수 밖에 없다. 여자 의사 선생님은 하얀 가운 대신에 그 어렵다는 스키니 빽바지와 흰셔츠를 입고 진분홍색 가디건을 입은 아줌마였다. 그리고 체온이 얼마였냐고 질문했다.
내 체온계는 EMS(항공특송)로 오고 있어요. 변명할 수가 없었다. 그냥 막 혼났다. 이렇게 빨리 아플 줄 알았으면 비행기에 들고 탔을텐데... EMS가 이렇게 늦게 올 줄 내가 알았냐고. 체온계도 구비하지 않은 엄마는 실격이지. 초장부터 실컷 혼나고 겨우 다음 대화로 넘어갔다. 해열제를 먹었다고 했는데, antipyretic이라고 말하는 내 발음을 antibiotics로 잘못 알아들은 선생님이 또 나를 혼냈다. 바이러스 감염이니 그 딴 거 필요없다고. 네...가, 감기 걸린 거죠? 선생님이 자꾸 혼내니까 그나마 잘하는 영어도 버퍼링이 걸렸다.
독일 오기 전 4개월 전부터 벼락치기로 독일어를 공부하긴 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나마 간판이나 메뉴판에서 이게 대충 뭔 말이구나 아는 정도. 마트에서 이거 주세요, 얼마에요, 고맙습니다 하는 정도. 얼마에요라고 물어도 가격을 하도 빨리 말해서 그냥 보고 계산하는 정도.
독일 사람들의 영어 수준은 전반적으로 매우 높다. 중고차 딜러샵, 휴대폰 대리점에에는 영어가 능숙한 세일즈맨들이 대기 중이다. 커튼집, 화장실 도기 판매업자, 마트 점원들은 잘 하기도 하고 전혀 못 하기도 하다. 대부분 사람들은 무척 친절한데, 나의 어메리칸 액센트 영어가 플러스 요인이 되는 것 같다. 본인들의 영어 실력을 발휘할 좋은 상대라고 생각하는 듯.
독일 오면 못 생겨질 줄은 예상하고 있었다. 패션의 불모지 독일, 그 중에서도 시골 오버우어젤, 그리고 무수리 생활. 못 생겨질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못 생겨질 줄은 몰랐다. 우리 가족은 독일 온 지 이틀만에 거지가 되었다. 남편은 밥 못 얻어 먹어서 꺼칠해지고, 애들은 옷이 별로 없어서 행색이 초라하고, 나는 무수리도 못 되고 노비생활이다.
그래도 내게는 어메리칸액센트 영어가 있다. 초기정착민인 나의 추레한 행색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대접을 찾아 먹을 수 있는 것은 나의 빛나는 지성 때문이라고 자뻑해본다. 나의 품위와 귀티를 지탱해주고 있는 고마운 나의 영어... 역시 사람은 외면보다 내면이 중요하지. 그래 맨날 같은 옷 입으면 어때.
하지만 이제는 너무 덥게 보이는 털신이 부끄러운 나. 신발 언제와...옷만 와봐라... 나 사실은 공주였어!라고 보여줘야지. 나 185개 박스 배로 보낸 여자야. 거기에 예쁜 거 많이 들었어... 아무도 안 물어보는데 혼자 묻고 혼자 답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EMS 배송상황을 확인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