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조선족 할머니의 뿌리를 찾아서

by 원쌤

중국 청도의 한국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를 할 때 일이다. 근처 재래시장에서 김치가 맛깔스럽게 담긴 하얀색 플라스틱통을 보았다. 한족들도 김치를 먹긴 하지만 왠지 정갈하고 깔끔한 것이 혹시나 했더니 역시 조선족 할머니가 주인이었다.


자그마한 체구지만 시원스러운 목소리와 함박 웃는 모습이 그냥 옆에만 있어도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할머니였다. 그날부터 우리 집 식탁에는 맛있는 김치가 빠지지 않았다. 장을 보러 갈 때마다 신선한 과일이나 야채, 고기 파는 곳도 알려주시고 한족상인에게는 흥정도 해 주시는 할머니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계약기간이 끝나서 귀국하려 할 때 내가 쓰던 가재도구를 당신이 다 사시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미리 부탁받은 물건 몇 개를 제외하고 책상, 의자, 압력밥솥, 신발 등 살림살이 일체를 거의 헐값에 드렸다.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몇 번이나 고맙다고 하시더니 돌아가신 친정아버지 친척들이 남한에 살고 있는데 혹시 찾아줄 수 있는지 물으셨다. 친정아버지가 열일곱 살에 만주로 가서 돈을 벌다가 6·25 전쟁으로 서신 왕래가 끊긴 후 청도로 이주했고, 10여 년 전 돌아가시면서 고향의 친척들을 찾으라는 유언을 남기셨다고 했다. 다음날 주소와 이름을 적은 쪽지를 가지고 다시 오신 할머니께서는 은혜를 꼭 갚겠다며 간곡하게 부탁하셨다.


귀국 후 밀렸던 일들을 처리하느라 정신없는 시간들이 흐르고 두 달쯤 지난 3월 중순부터 할머니의 친척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써주신 종이에는 경상북도 선산군 고암면 내외동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경상북도 선산군이라는 주소가 나오지 않았다. 너무 오래전이라 주소가 바뀐 것 같아서 경상북도 홈페이지에 들어가 확인하니 선산군이 구미시에 편입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구미시의 고암면을 찾았는데 역시 고암면은 없고 발음이 비슷한 고아읍만 있었다.


읍사무소에 전화를 해 오래전 그 마을에 살았던 사람의 일가친척을 찾는다고 하자 그렇게 해서는 찾기 어려우니 직접 오는 것이 낫겠단다. 서울이라 곤란하다고 하자,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나이가 좀 지긋한 목소리의 다른 직원을 바꾸어주었다.

다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나서 내외동이라는 곳이 있는지 묻자, 내외동은 없으나 내예리는 있다면서 그곳의 이장님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셨다.

그날은 그렇게 마무리한 후, 다음날 아침 일찍 이장님께 전화를 했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통화에 적잖은 방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사정을 또 이야기하자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 동네의 ‘승’ 자 항렬 이신 분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셨다.

그 번호로부터 시작해 4번째 연결 후에 드디어 그 할머니의 막내 작은 아버지라는 분과 통화가 되었다. 대부분 연세가 많고 사투리가 심해 알아듣기도 힘든 데다가 똑같은 이야기를 큰 소리로 되풀이하느라 목도 아팠으나, 눈물을 글썽이던 할머니 모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차근차근 이어나갔다.


그분은 본인이 막내라서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자기의 둘째 형님이 만주에 돈 벌러 갔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현재는 다른 형제분들은 다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러면서 뜻밖의 소식에 놀라셨는지 자꾸 헛기침을 하시면서 내가 누군지, 그 할머니랑은 어떤 관계인지, 또 어떻게 자기를 알게 되었는지 등 여러 가지를 물으셨다.

난 그간의 이야기를 또 간단하게 말씀드린 후, 할머니 번호를 알려드리고 전화 거는 방법을 자세히 말씀드렸다.


그날 저녁, 홀가분한 마음으로 할머니께 전화를 했다.

"할머니, 여기 한국이에요. 저 기억하세요?"

"그럼, 그럼 알지, 내 알지"

"할머니 친척 분들 찾았어요. 제가 할머니 전화번호 알려드렸으니까 거기서

이제 전화하실 거예요".

"···········"

"할머니, 할머니?"

"고맙소다. 참 고맙소다".

할머니는 흐느끼시느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셨다.

나도 눈물이 핑 돌았다.


그 후 구미시의 작은 아버님과 몇 번 통화를 했다. 식사대접하고 싶으니 꼭 한 번 오라는 말씀이었으나, 차일피일 미루는 동안 1년이 지났다. 어느 날 낯선 번호의 전화를 받았다.

“원 선생님, 여기 한국이라요. “ 조선족 할머니의 전화였다. 너무나 반가웠다. 할머니는 작은 아버지의 초청으로 얼마 전에 한국에 왔으며, 지금은 수원에서 파출부 일을 하신다고 했다.


할머니와 한 번 만나기로 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가 연락이 끊어졌다. 지하철로 두 시간 정도 거리인데도 그 귀한 인연을 이어가지 못한 나의 게으름이 지금까지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잘못된 칭찬이 아이를 망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