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최선이 아이에게는 최악이 될 수 있다.
초등학생들이 하교하는 오후 1~2시 사이, 학교 정문 앞은 아이들 가방을 둘러멘 엄마들로 가득하다. 요즘은 대부분 교과서나 학용품을 학교 사물함에 두고 다니기 때문에 가방이 무겁지 않다. 그런데도 자기 가방을 스스로 메고 나오는 아이는 거의 없다.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교하기를 바라는 부모 마음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진정 내 아이를 위하는 일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아이들은 부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힘이 세고 건강하다. 아이들의 숙제를 대신해 주고, 가방을 들어주는 게 별일 아닌 것 같고, 그렇게 하다 보면 아이들이 좀 편해질 것 같지만, 그런 것들이 오히려 아이의 자립심을 앗아간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온갖 종류의 도전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모든 걸 대신해 준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기르지 못한 채, 거친 세상 속으로 던져지게 된다. 아이를 지나치게 사랑했던 친절한 부모 덕분에.
부모의 말 한마디가 때로 아이에게는 부정적인 메시지로 전달될 수 있다. “열심히 해야 돼”라는 말은 아이에게 “너 지금의 상태로는 안 돼”라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 “엄마가 해 줄게”라는 말은 “넌 이걸 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하지 않아”라는 무의식적 신호가 된다. 말하는 사람의 입장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꼭 필요한 이유이다.
자식을 대신해서 박물관을 탐방하고 예술 공연을 본 다음 감상문을 대신 써주는 엄마는 자식의 앞날을 망쳐놓는 미련한 여자이다. 무엇인가 관찰하고, 느끼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는 훈련을 쌓는 기회를 엄마가 박탈해 버리기 때문이다(안정효)
사실 아이들은 자신이 부탁한 것보다 더 많은 도움을 받는 것을 싫어한다. 그들은 이런 무의식적인 메시지를 듣기 때문이다. “넌 이걸 배우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 만큼 지혜롭지 못해. 그게 중요하다는 걸 안다고 하더라도 이걸 배울 수 있을 만큼 똑똑하지 못해.” 이런 암묵적 메시지가 아이의 자존감과 성장 욕구를 무너뜨린다.
아이들은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기차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배움은 비 선형적이며 매우 불규칙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이들 스스로가 정말 알 필요가 있어서 배운 것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부모가 아무리 잘 가르친다고 해도 아이는 결국 자기 나름의 이유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할 때 훨씬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원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지나치게 친절한 부모가 자녀를 사회성이 부족한 어른으로 만든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쉽게 얻어온 아이는 타인과의 협상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토론이나 타협, 수용 등의 능력은 갈등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받아주고 대신 해결해 준 부모 덕분에 아이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어른’으로 자라난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일들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사랑’이 아니라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다.
서로를 지극히 사랑한 사자와 소가 결혼을 했다. 소는 사자를 위해 신선한 풀을 내놓았고, 사자는 소를 위해 맛있는 고기를 매일 식탁에 올렸다.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참아내던 그들은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서로에게 한 말은 “난 최선을 다했어.”였다. 나의 최선이 종종 상대에게는 최악이 될 수도 있다.
어릴 적 결핍을 많이 느꼈던 부모일수록 자기 아이에게 부족함 없는 사랑을 주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그런 지나친 애정이 오히려 아이를 숨 막히게 만들 수도 있다.
나무에 물을 너무 많이 주면 뿌리가 썩거나 떠 버리는 것처럼, 자애롭기만 한 부모는 결국 아이를 망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