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이야기를 하면 머리가 아프다는 사람들이 있다. 이해한다. 뉴스를 켜면 누가 누구를 공격하고, 어느 당이 어느 당을 비난하고, 저마다 자기가 옳다고 소리를 지른다. 보다 보면 지친다. 그냥 다 비슷비슷한 것 같고, 어차피 바뀌는 것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정치가 지겹다는 느낌 자체가 이미 정치에 관한 판단이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 저 사람들이 진짜로 나를 위해 일하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 말만 번지르르하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안 변한다는 느낌. 이 느낌이 어디서 오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정치가 왜 이렇게 됐는지, 그리고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그 생각의 이름이 제도보전주의다. 어려운 이름처럼 들리지만, 핵심은 단순하다. 정치는 사람에게 기댈 게 아니라 구조를 만드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를 천천히 풀어보겠다.
먼저 아주 단순한 질문 하나. 당신은 지금 자유로운가.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원하는 것을 먹고, 원하는 곳에 가고,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법적으로 막는 것도 없다. 자유롭다.
그런데 이 상황을 생각해 보자. 당신이 직장에 다닌다. 상사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야근도 없고, 부당한 지시도 없다. 그런데 그 상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당신을 해고할 수 있다. 이유가 없어도 된다. 법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다. 당신은 이 상황에서 진짜로 자유로운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뭔가 이상하다. 실제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강요도 없었고, 협박도 없었다. 그런데 당신은 상사 눈치를 본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킨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그냥 넘긴다. 강요당한 게 아닌데, 그렇다고 완전히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왜 그런가. 상사가 언제든 당신의 생계를 끊을 수 있는 권한을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권한을 쓰지 않아도, 그 권한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당신의 행동을 바꿔놓는다. 이것이 진짜 문제다.
자유란 지금 당장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구조 자체가 없는 상태다. 이 차이가 제도보전주의가 세상을 보는 방식의 첫 번째 핵심이다.
그리고 이것은 직장 이야기만이 아니다. 정치도 똑같다.
대통령이 지금 당장 나쁜 일을 하지 않아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권한이 너무 많이 집중되어 있다면 문제다. 법이 지금 당장 나를 괴롭히지 않아도, 권력자가 마음대로 법을 해석하거나 집행할 수 있다면 문제다. 실제로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안전하다는 뜻이 아니다.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없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진짜 안전이다.
2024년 12월에 대통령이 갑자기 계엄을 선포했다.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그 충격이 어디서 왔는가이다. 나쁜 사람이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의 판단으로 나라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구조가 아무런 저항 없이 존재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을 미리 막을 장치가 없었다. 사후에 탄핵으로 수습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것이 제도보전주의가 말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다. 좋은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나쁜 사람도 나쁜 짓을 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정치는 사람을 고르는 일이기 전에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다.
자, 그런데 무엇을 지키기 위해 구조를 만드는가. 그냥 아무 구조나 만들면 되는 게 아니다. 어떤 구조는 오히려 사람들을 더 옭아맬 수도 있다.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제도보전주의의 목표는 이것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제멋대로인 권한에 종속되지 않는 상태를 만드는 것. 앞서 말한 직장 예시로 돌아가면, 그 노동자가 진짜로 자유로워지려면 상사가 마음대로 해고할 수 없는 구조가 필요하다. 아니면 최소한, 설령 잘리더라도 당장 생계가 무너지지 않는 안전망이 필요하다. 한 사람의 결정에 나의 전부가 달린 상황 자체를 없애는 것이 목표다.
이것이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본소득이란 일을 하든 안 하든 국가가 모든 시민에게 기본적인 생활비를 주는 제도다. 이것을 퍼주기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제도보전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 제도의 의미는 다르다. 어떤 고용주도, 어떤 권력자도, 당신의 생계를 무기로 당신을 협박할 수 없게 만드는 구조의 일부다. 일자리를 잃어도 당장 굶지 않는다면, 부당한 지시를 거부할 힘이 생긴다. 자유는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여기서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다. 돈을 퍼주면 나라 재정이 망하지 않나. 이것은 방법의 문제이고 원칙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재원을 마련할 것인지, 얼마를 줄 것인지, 어떤 순서로 도입할 것인지는 상황에 따라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찾으면 된다. 목표가 옳다면 방법은 현실에 맞게 설계하면 된다.
이것이 경제 정책에 대한 제도보전주의의 태도다. 경제에는 정답이 없다. 어떤 시대에는 정부가 돈을 많이 써야 경제가 살아나고, 어떤 시대에는 반대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경제학자들도 이것을 두고 수십 년째 싸우고 있다. 그러니 하나의 경제 방식만이 영원히 옳다고 고집하는 것은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걸 원칙이 없는 거 아니냐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당신이 서울에서 부산에 가려고 한다. 목적지는 부산이다. 날씨가 좋으면 자동차로 가고, 폭설이 내리면 기차를 탄다. 교통 상황이 막히면 다른 경로를 찾는다. 이것이 원칙 없는 기회주의인가. 아니다. 목적지가 하나로 고정되어 있으니까, 수단은 상황에 따라 바꾸는 것이다. 경제 정책도 마찬가지다. 목표는 하나다.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는 상태를 만드는 것. 그 목표를 위해 지금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 기회주의가 아니라 실용적인 태도다.
이번엔 다수결 이야기를 해보자. 민주주의는 다수결이라고 배웠다. 많은 사람이 원하면 그게 옳은 것이다. 정말 그런가.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자. 어떤 동네에서 투표했다. 열 명 중 여섯 명이 동네에 사는 한 가족을 쫓아내기로 했다. 투표는 공정했다. 결과는 6대4였다. 이것이 정당한가.
대부분의 사람은 아니라고 느낀다. 그런데 왜인가. 다수결로 결정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나온다. 어떻게 결정됐느냐만큼, 무엇을 결정할 수 있느냐도 중요하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원해도, 특정 누군가를 이유 없이 짓밟는 결정은 정당하지 않다. 다수가 원한다는 사실이 그 결정을 옳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한국 정치에서도 이런 일이 반복된다. 지지율이 높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논리. 우리가 이겼으니, 반대파는 입 닥치라는 태도. 이것이 위험한 이유는 다수의 감정을 정당성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화가 났다는 사실이 그 분노의 대상에게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허가증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결정을 정당하게 만드는가. 제도보전주의의 답은 이렇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충분히 토론했는가. 반대 의견을 들었는가. 소수의 목소리가 무시되지 않았는가. 이 과정을 거친 결정이라면, 설령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결론이 나와도 그 결정을 따른다. 이것이 법과 제도를 존중하는 태도다.
내가 동의하지 않을 때만 제도를 따르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제도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내 편할 때만 쓰는 도구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퍼지면 제도 자체가 무너진다.
이제 이 사상이 왜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동시에 불편함을 주는지 이야기할 차례다.
제도보전주의는 전통적인 가족 구조를 존중하고 종교적 가치관을 중시한다.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이것이 불편하다. 동시에 제도보전주의는 재벌 개혁을 주장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강조하며 기본소득을 지지한다. 재벌 개혁이란 삼성이나 현대 같은 대기업 집단이 경제 전체에 지나치게 큰 권한을 갖는 구조를 바꾸자는 것이다. 보수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이것이 불편하다.
왜 이런 조합이 나오는가. 원칙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타인의 제멋대로인 권한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이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하면, 노동자가 고용주에게 종속되는 것도 문제고, 국가가 개인의 가치관에 간섭하는 것도 문제다. 진보는 경제적 종속에는 민감하면서 국가가 사회적 가치관에 개입하는 것에는 관대한 경향이 있다. 보수는 반대다. 제도보전주의는 어느 쪽도 아니다. 같은 원칙을 모든 방향에 동일하게 적용한다.
그렇다면 내가 도덕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특정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깊이 믿는다면, 그것을 법으로 금지해야 하는가.
제도보전주의의 답은 이렇다. 내가 무언가를 도덕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신앙과 양심의 문제다. 그것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런데 국가가 그 판단을 모든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에게 국가가 내 도덕관을 법으로 강제한다면, 그것 역시 그 사람을 내 판단에 종속시키는 것이 된다. 그래서 도덕적 신념은 유지하되, 그것을 법으로 만들지는 사회 전체가 충분히 토론해서 결정하는 과정에 맡긴다.
이것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 있다. 그런데 내가 옳다는 확신만으로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강요하려면 충분한 토론과 합의가 먼저다.
마지막으로 이 사상의 이름으로 돌아가자. 제도보전주의. 제도란 규칙과 구조를 말한다. 보전이란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을 지킨다는 뜻이다. 합치면 이렇게 된다.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을 규칙과 구조를 통해 지킨다.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 누구도 다른 사람의 제멋대로인 권한에 종속되지 않는 상태. 그것을 지키는 방법은 좋은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쁜 사람도 나쁜 짓을 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그 구조를 무엇으로 만드는가. 법과 제도로 만든다. 법과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감시하고 요구하는 것이 시민의 역할이다.
한국 정치가 지겹고 피곤하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사람들이 구조가 아니라 사람에게 기대왔기 때문이다. 좋은 대통령, 좋은 정치인이 나타나면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 그 기대가 무너질 때마다 실망이 반복됐다. 제도보전주의가 말하는 것은 그 기대의 방향을 바꾸자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구조를 바꾸자. 좋은 사람을 고르는 것보다 나쁜 사람도 통제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더 확실하다.
그것이 정치가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시민이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