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상황을 생각해 보자.
첫 번째. 당신은 중소기업에서 일한다. 사장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야근을 시키지 않고, 부당한 지시도 없다. 그런데 당신은 매달 조마조마하다. 사장 기분이 나쁜 날, 회사 매출이 떨어지는 달, 당신은 아무 이유 없이 잘릴 수 있다. 법적으로 막을 방법도 없다. 당신은 자유로운가.
대부분의 사람은 이 상황에서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막상 왜 그런지를 설명하려고 하면 막힌다. 실제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간섭도 없었고 강제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 노동자가 자유롭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누군가가 언제든 당신의 삶을 뒤흔들 수 있는 권한을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당신의 행동을 제약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상사의 눈치를 보고,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마음에 들지 않는 지시도 그냥 받아들인다. 강요당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발적 선택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자유란 단순히 지금 간섭받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구조 자체가 없어야 한다. 이것이 제도보전주의가 자유를 이해하는 방식의 출발점이다.
두 번째 상황. 어떤 나라의 국민 다수가 투표를 통해 특정 소수 집단을 추방하기로 했다. 투표율은 높았고,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절차상 아무 문제가 없다. 이것은 정당한가.
대부분의 사람은 이것이 잘못됐다고 느낀다. 그런데 왜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민주주의란 다수결이라고 배웠으니까. 그렇다면 다수가 결정했으면 된 것 아닌가. 이 불편함의 정체는 다수의 결정이라는 사실이 그 결정의 내용을 정당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직관이다. 많은 사람이 원한다는 것은 그 일이 옳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역사를 돌아보면 이것은 추상적 사례가 아니다. 다수의 이름으로, 국민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들이 있었다. 선거로 뽑힌 지도자가 선거를 없애버린 사례도 있었다. 오늘날에도 "나만이 진짜 국민의 편"이라고 외치며 반대 세력을 적으로 규정하는 정치인들이 있다. 이런 정치가 위험한 이유는 다수의 감정을 정당성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분노한다는 사실이 그 분노의 대상을 향한 어떤 행동이든 허용한다는 논리로 이어질 때, 민주주의는 자신을 파괴하는 도구가 된다.
그래서 제도보전주의는 이렇게 말한다. 다수가 원한다는 사실은 정당성의 재료가 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정당성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정당성은 충분한 토론이 이루어졌는지, 반대 의견이 억압되지 않았는지, 소수가 보호받았는지의 과정에서 나온다. 결과가 아니라 절차가 정당성의 근거다. 그리고 그 절차를 보장하는 것이 제도다.
세 번째 상황. 나라가 경제 위기에 처했다. 한 전문가는 정부가 돈을 더 풀어야 한다고 하고, 다른 전문가는 지출을 줄여야 한다고 한다. 둘 다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학자다. 어느 쪽이 옳은가.
정답은 없다.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질문에 대한 합의가 없다. 1970년대에는 정부가 돈을 푸는 방식이 통한다고 믿었는데, 그 시기에 물가와 실업률이 동시에 치솟으면서 그 믿음이 흔들렸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반대로 정부 개입을 줄이는 방식이 비판받았다. 어떤 처방도 모든 상황에서 옳지 않았다.
이것을 인정하면 불편한 질문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경제 정책을 상황에 따라 바꾸는 것이 원칙 없는 기회주의 아닌가. 오늘은 이 방식, 내일은 저 방식을 쓰는 것이 그냥 편의에 따른 선택 아닌가.
이것이 제도보전주의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비판 중 하나다. 그리고 이 비판에 정면으로 답해야 한다.
경제 정책을 상황에 따라 바꾸는 것은, 목표가 바뀌기 때문이 아니라 목표가 하나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목표는 이것이다. 사람들이 경제적 종속 때문에 자신의 삶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구조를 없애는 것. 처음의 직장 예시로 돌아가 보면, 그 노동자가 진짜로 자유로워지려면 단순히 법적 간섭이 없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언제든 잘릴 수 있다는 공포 자체를 줄여야 한다. 그 공포는 경제적 취약함에서 나온다. 생계를 오로지 이 일자리에만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온다. 따라서 경제가 나빠지면 더 많은 사람이 취약함에 노출된다. 그것은 곧 더 많은 사람이 자의적 지배에 노출된다는 뜻이다.
경제 정책은 이 목표를 위한 수단이다. 어떤 수단이 지금 이 목표를 더 잘 달성하는지를 묻는 것이지, 수단 자체에 대한 이념적 충성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목적지는 하나인데 도로 상황에 따라 경로를 바꾸는 것을 기회주의라고 하지는 않는다.
이 세 가지 상황에서 공통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제 보인다. 더 나은 사람이 아니다. 좋은 의도를 가진 지도자도 나쁜 구조 안에서는 나쁜 결과를 낸다는 것을 우리는 반복해서 목격했다. 도덕적 각성도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것은 구조를 바꾸는 것보다 훨씬 느리고 불안정하다. 필요한 것은 제도다. 나쁜 사람도 좋은 제도 안에서는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좋은 사람도 나쁜 제도 안에서는 좋은 결과를 내기 어렵다. 정치는 선악의 대결이 아니라 구조의 설계 문제다.
그렇다면 무엇을 지키기 위해 제도를 설계하는가. 이것이 제도보전주의가 스스로에게 묻는 말이다. 답은 앞서 첫 번째 상황에서 이미 나왔다. 누구도 타인의 자의적 권한에 구조적으로 종속되지 않는 상태. 이것을 지키기 위해 제도를 설계한다.
여기서 이 사상이 좌파에게도 우파에게도 동시에 불편함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왜 이 사상의 결함이 아닌지를.
이 사상은 전통적 가족관을 가지고 종교적 도덕 기준을 존중한다. 진보 진영에서는 이것이 불편하다. 동시에 이 사상은 재벌 개혁을 주장하고 기본소득을 지지하며 노동자의 경제적 취약함을 구조의 문제로 본다. 보수 진영에서는 이것이 불편하다.
그런데 이 불편함의 구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진보는 경제적 불평등에는 민감하면서 사회적 전통에는 적대적이고, 보수는 사회적 전통에는 친화적이면서 경제적 불평등에는 둔감하다. 둘 다 자신이 중시하는 영역에서는 사람들을 종속 구조에서 해방하려 하지만, 자신이 덜 중시하는 영역에서는 그 종속 구조를 방치하거나 오히려 강화한다. 제도보전주의는 이 선택적 적용을 거부한다. 누구도 자의적 지배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경제 영역에도, 사회 영역에도 동일하게 적용한다. 양쪽 모두에서 불편함을 일으키는 것은 그 원칙이 일관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긴장이 남는다. 도덕적 신념과 제도 설계의 관계다. 어떤 것이 도덕적으로 잘못됐다고 믿는다면, 그것을 법으로 금지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이 사상은 이렇게 답한다. 내가 어떤 것을 도덕적으로 잘못됐다고 판단하는 것은 나의 신앙과 양심의 영역이다. 그러나 국가가 그 판단을 모든 사람에게 강제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내 도덕관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 국가가 그것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자의적 지배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도덕적 신념은 유지하되, 그것을 제도로 만들지는 사회 구성원들이 충분히 토론하고 결정하는 과정에 맡긴다.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것도 그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사상의 이름이 제도보전주의인 이유는 이제 설명하지 않아도 보인다.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을 가려내고, 그것을 제도로 보전한다.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의 기준은 사람들이 자의적 지배에 종속되지 않는 구조다. 그것을 지키는 방법은 감정적 호소도 도덕적 설교도 아니라 제도의 설계다. 그리고 제도를 설계하는 방식은 이념적 선언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이 그 목표를 가장 잘 달성하는가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다.
한국 정치를 보면 보수도 진보도 이 질문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다. 보수는 기득권을 지키는 것을 질서 유지라고 불렀고, 진보는 도덕적 분노를 사회 변화라고 불렀다. 둘 다 제도를 설계한 것이 아니라 감정을 소비한 것이다. 제도보전주의가 한국 정치에서 하려는 것은 그 질문을 처음부터 다시 묻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지킬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