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는 이유부터 말하겠다.
학술 논문을 쓰는 것도 아니고, 정당을 만들자는 것도 아니다. 한국 정치를 보면서 오래도록 이 질문을 붙들고 있었다. 보수도 진보도 자기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실제로는 지키지 않는다. 보수는 질서와 제도를 말하면서 헌정을 파괴했고, 진보는 평등과 자유를 말하면서 설계 없는 도덕주의에 머물렀다. 그 간극에서 내가 실제로 동의할 수 있는 정치적 입장이 무엇인지를 정리한 것이 제도보전주의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글이기도 하지만, 솔직히는 내 생각을 스스로 검증하기 위한 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글은 반론을 환영한다. 반론을 통해 이 사상이 강해지거나, 아니면 틀린 부분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제도보전주의를 한 문장으로 말하면 이렇다. 누구도 타인의 자의적 권한에 종속되지 않는 구조를 제도로 설계하고 보전하는 정치적 태도. 자의적이라는 말은 이유 없이, 기준 없이, 마음대로라는 뜻이다. 상사가 기분에 따라 해고하는 것, 권력자가 법을 자기 편의에 따라 해석하는 것, 다수가 감정에 따라 소수를 짓밟는 것이 모두 자의적 권한의 행사다. 이것을 구조적으로 차단하는 것이 이 사상의 목표다.
이 목표를 정당화하는 논거는 선언이 아니라 관찰에서 나온다. 한국 정치사를 보면, 나쁜 결과는 대체로 나쁜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쁜 구조 때문에 발생했다. 2024년의 계엄 사태는 한 개인의 일탈이기도 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대통령 한 사람에게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구조적으로 집중되어 있었다는 사실의 산물이다. 역대 정권의 부패 사례들도 마찬가지다. 권한을 가진 사람이 그 권한을 자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구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나쁜 사람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더 확실한 이유가 여기 있다. 이것은 추상적 명제가 아니라 반복된 역사적 패턴에서 나온 귀납이다.
이 사상의 철학적 구성을 말하기 전에, 먼저 이 사상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정면으로 다루겠다. 비판을 회피하면서 사상을 소개하는 것은 지적으로 정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첫 번째 비판. 사회 보수적 가치관과 비지배 자유 원칙이 충돌하지 않는가. 이 사상은 전통적 가족관, 위계, 종교적 도덕 기준을 존중한다. 그런데 강력한 사회 보수적 위계가 존재하는 공동체 안에서 소수자는 국가의 직접적 개입 없이도 이미 자의적 지배의 공포를 경험한다. 종교 공동체 안의 성소수자, 보수적 가족 구조 안의 여성, 전통적 위계를 강요받는 청년이 그 예다. 국가가 손을 놓고 있으면 그 지배는 제도 바깥에서 작동한다. 비지배 자유를 최상위 원칙으로 내세우면서 사회 보수적 위계를 존중하는 것이 어떻게 정합적인가.
이 긴장은 실재한다. 솔직히 인정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 사상이 가장 정밀하게 다뤄야 하는 지점이다. 해법의 방향은 이렇다. 비지배 자유 원칙은 국가 권력의 자의적 행사만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의 자의적 지배 구조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종교 공동체나 가족 구조 안에서 발생하는 자의적 지배. 즉 탈출할 수 없거나 탈출에 과도한 비용이 따르는 구조는 제도적 개입의 대상이 된다. 공동체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것이 그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지배를 방치한다는 뜻이 아니다. 가톨릭 사회 교리에서 가져온 보조성 원리. 즉 상위 기관이 하위 공동체의 자율을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은, 그 공동체가 내부 구성원의 비지배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할 때는 적용의 한계에 부딪힌다. 다만 어디까지가 정당한 공동체의 자율이고 어디서부터가 제도적 개입이 필요한 지배인지의 경계 설정은 단순하지 않다. 이것은 이 사상이 아직 충분히 정교화하지 못한 과제이며, 숙의민주주의적 절차를 통해 사회적으로 계속 논의되어야 한다.
두 번째 비판. 정당한 숙의 절차를 거쳤지만, 결과적으로 비지배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결정이 내려졌다면, 그것도 공화주의적 복종의 이름으로 따라야 하는가. 절차가 결과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나쁜 제도를 방치하는 근거가 될 위험이 있지 않은가.
이것은 정치철학에서 오래된 논쟁이다. 절차적 정당성과 실질적 정당성의 긴장. 이 사상의 입장은 이렇다. 절차는 정당성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정당한 절차를 거쳤다고 해서 그 결과가 무조건 옳다는 뜻이 아니다. 절차가 정당했다면 그 결과를 바꾸려는 시도 역시 절차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절차를 무시하고 뒤집는 것이 아니라, 다시 절차 안에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한계가 추가된다. 절차 자체가 비지배 자유를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때. 즉 그 결정이 특정 집단의 정치적 참여 자체를 영구적으로 차단하거나 제도적 개혁의 가능성을 봉쇄할 때는 그 절차의 권위가 자신을 무력화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이 합법적 절차를 통해 히틀러에게 권한을 위임한 것이 역사적 사례다. 이 경우는 절차적 정당성이 실질적 정당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사상은 절차를 존중하되, 그 절차 자체가 비지배 자유의 구조적 토대를 파괴할 때는 저항의 권리가 발생한다고 본다. 이 저항의 권리를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가는 헌법적 설계의 문제이고, 위헌 심사 기구의 독립성 강화, 기본권의 불가침 영역 설정 등이 그 방향이다.
세 번째 비판. 경제 정책의 기준이 비지배 자유의 구현이라고 하지만, 비지배 자유라는 개념이 추상적이기 때문에 집권 세력이 어떤 정책이든 이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지 않은가. 전천후 논리로 오용될 소지가 있다.
이 비판은 타당하다. 모든 상위 원칙은 오용될 수 있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라는 말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다양하게 오용됐는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 이 위험을 줄이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비지배 자유의 훼손을 판단하는 기준을 최대한 구체화하는 것이다. 경제적 종속이 심화했는가를 측정할 수 있는 지표. 예컨대 소득 불평등 지수, 노동시장 이중구조 비율, 사회 이동성 지표 등이 그것이다. 추상적 원칙을 구체적 측정 가능한 기준으로 내려야 오용을 막을 수 있다. 둘째. 경제 정책의 결정 과정 자체를 자의성으로부터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독립적 경제 자문 기구, 의회 내 전문 위원회, 헌법적 재정 준칙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제도들 자체도 포획될 수 있다. 유럽중앙은행이 특정 경제 학파의 논리로 긴축을 강제한 것이 그 사례다. 따라서 이 제도들의 구성 방식과 포획 방지 메커니즘까지 설계해야 완결된다. 이 부분은 이 사상이 아직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과제다. 방향은 있지만 구체적 설계는 미완이다.
이제 이 사상의 구성을 말할 차례다.
제도보전주의는 다섯 개의 원천에서 가져온 것들을 하나의 체계로 통합한다. 필립 페팃의 신공화주의에서 비지배 자유 원칙을, 에드먼드 버크의 보수주의에서 점진적 개혁의 방법론을, 가톨릭 사회 교리에서 보조성과 연대성의 원리를, 숙의민주주의 이론에서 절차적 정당성의 논거를, 그리고 제도경제학에서 구조가 행동을 결정한다는 통찰을 가져왔다.
이것들이 왜 하나의 체계 안에서 정합적인가. 버크의 방법론은 내용이 아니라 태도를 계승한다. 급진적 파괴보다 검증된 것을 존중하는 태도. 그러나 버크가 전통의 권위를 독립적 정당성의 근거로 삼은 것을 그대로 가져오지는 않는다. 이 사상에서 모든 전통과 권위는 비지배 자유 기준에 종속된다. 오래됐다는 사실이 그것을 지켜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지켜야 할 이유는 그것이 비지배 자유를 실질적으로 지지하는가에 있다.
가톨릭 사회 교리의 연대성 원리는 기본소득과 복지를 정당화하는 도덕적 근거다. 공동체 구성원이 서로에 대해 구조적 책임을 진다는 이 원리는 경제적 취약함이 자의적 지배의 원천이 된다는 비지배 자유 논거와 맞물린다. 가난한 사람은 법적 간섭이 없어도 생존을 위해 착취적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기본소득을 퍼주기가 아니라 비지배 자유의 물질적 전제로 보는 이유다.
숙의민주주의적 절차론은 이 사상이 다수결 민주주의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단순 다수결은 숙의가 아니다. 충분한 정보, 반대 의견의 보호, 소수자의 참여 보장이 갖춰진 과정을 거친 결정만이 절차적 정당성을 갖는다. 이것은 두 번째 비판에서 말한 절차의 한계와 연결된다. 숙의 절차가 자신을 파괴하는 결정을 내릴 때 그 절차의 권위는 스스로 무너진다.
이 사상이 한국의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불편함을 일으키는 이유를 말해야 한다. 이것은 이 사상의 약점이 아니라 일관성의 증거다.
진보는 이 사상의 사회 보수적 가치관, 전통적 가족관, 종교적 도덕 기준에 불편함을 느낀다. 보수는 이 사상의 케인지언적 경제관 수용 가능성, 기본소득 지지, 재벌 구조 비판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런데 진보는 경제적 종속에 민감하면서 사회적 위계에 의한 종속에는 선택적으로 반응하고, 보수는 반대다. 둘 다 비지배 자유를 일관되게 적용하지 않는다. 이 사상은 경제 영역에도 사회 영역에도 동일한 원칙을 적용한다. 그 결과가 어느 진영의 감정도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은, 이 원칙이 진영 논리보다 상위에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모든 사회 문제는 설계의 실패다"라는 명제에 대한 반론을 다루겠다. 이것이 논증 없는 선언처럼 보인다는 비판이 있었다.
이 명제를 그대로 고수하면 과잉이다. 모든 사회 문제가 설계의 실패는 아니다. 자연재해, 기술의 예상치 못한 부작용, 가치관의 충돌처럼 설계로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따라서 이 명제를 수정한다.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구조적 사회 문제의 핵심에는 대체로 제도 설계의 실패가 있다. 한국에서 반복되는 권력 남용, 부패, 양극화는 특정 나쁜 개인들의 출현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가능하게 하거나 유인하는 구조가 반복적으로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적 패턴에서 나온 주장이지 선험적 선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틀렸다면, 구조가 아닌 다른 무엇이 그 반복의 원인인지를 설명하는 더 나은 논거가 있어야 한다.
제도보전주의는 완성된 사상이 아니다. 위에서 솔직하게 인정했듯이, 사회 보수적 위계와 비지배 자유의 경계 설정, 경제 정책 판단 기준의 구체화, 나쁜 절차에 대한 저항의 제도화가 아직 충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다. 이 글은 그 과제를 향한 하나의 출발점이다. 반론이 있다면 그 반론이 이 사상을 더 정교하게 만드는 재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