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제를 오랫동안 피해 왔다.
동성혼은 내가 구축하려는 사상 체계에서 유독 정립이 더뎠던 주제다. 솔직히 말하면 피하고 싶었던 주제이기도 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 사안은 내가 사상적으로 의지하는 두 축. 즉 비지배 자유 원칙과 사회보수주의적 가치관이 가장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다른 현안들에서는 두 축이 어느 정도 조화를 이루거나, 긴장이 있더라도 우선순위를 정하면 해결이 됐다. 그런데 동성혼은 그 긴장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그래서 이 글은 깔끔한 결론을 제시하는 글이 아니다. 세 개의 철학적 시각을 정직하게 검토하고, 그 위에서 내 견해를 밝히는 글이다. 동의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이 논증 구조가 이 사안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다.
먼저 페팃의 시각에서 시작하자. 이것이 가장 불편한 지점이기 때문에 먼저 다룬다.
필립 페팃의 비지배 자유 원칙을 동성혼에 적용하면 논리는 직선적이다. 국가가 특정 시민들에게 결혼이라는 법적 제도에 접근할 수 없도록 막는 것은 그 시민들을 차별하는 공적 지배의 한 형태다. 동성 커플이 이성 커플과 동일한 법적 지위를 갖지 못한다면, 그들은 병원에서 파트너의 수술 동의를 할 수 없고, 상속에서 배제되며, 세제 혜택에서 제외된다. 이것은 추상적 차별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취약성이다. 페팃의 언어로 말하면, 이 취약성이 존재하는 한 그들은 자의적 지배에 노출된 상태다.
페팃은 여기서 더 나아가 표현적 평등주의를 말한다. 국가가 특정 집단의 결합 방식을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혜택을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의 삶의 방식을 열등한 것으로, 공식적으로 분류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것이 2등 시민을 만드는 국가적 행위라면, 비지배 원칙은 그것에 반대한다.
이 논리를 나는 무시할 수 없다. 페팃의 비지배 자유 원칙은 내 사상 체계의 최상위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하면 동성혼 반대 논리가 상당히 흔들린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이 주제가 불편했던 이유다.
그러나 여기서 버크를 불러와야 한다.
버크의 관점에서 동성혼은 수천 년간 검증된 제도를 추상적 이성의 논리로 해체하려는 시도다. 버크가 프랑스 혁명에 반대한 이유를 기억해 보자. 그는 자유, 평등, 형제애라는 개념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 추상적 원칙들을 근거로 역사적으로 축적된 제도를 일거에 파괴하는 방식에 반대했다. 버크에게 결혼은 두 개인 사이의 계약이 아니라 세대 간 파트너십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 사이의 약속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동성혼 찬성 논리가 안고 있는 한 가지 맹점이 드러난다. 그것은 결혼을 자율적인 두 개인의 계약으로만 환원한다는 것이다. 결혼에는 그것을 넘어서는 사회적 기능이 있다. 세대의 재생산, 공동체의 연속성, 아이를 키우는 환경의 제공. 이것들을 결혼 제도와 무관한 것으로 분리하면, 결혼의 사회적 의미는 급격히 희박해진다.
버크적 방법론이 요구하는 것은 이렇다. 급격한 변화보다 점진적 적응. 추상적 원칙의 강제적 적용보다 사회가 스스로 변화할 시간을 주는 것. 물론 버크를 완전히 따르는 보수주의자라도 동성혼에 관한 판단이 갈린다는 점은 짚어야 한다. 일부 현대 보수주의자들은 오히려 동성 커플을 결혼이라는 책임 있는 제도 안으로 포섭하는 것이 더 보수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성적 방종보다 안정적 결합을 제도화하는 것이 사회 질서에 더 이롭다는 논거다. 이것도 버크의 언어 안에서 가능한 논리다. 버크는 단순히 현상 유지를 말한 것이 아니라, 보존과 교정의 균형을 말했으니까.
사회보수주의적 관점은 내가 가장 동의하는 지점이면서 동시에 가장 정직하게 검토해야 하는 지점이다.
사회보수주의가 동성혼에 반대하는 이유는 단순한 혐오가 아니다. 그 뿌리는 더 깊다. 결혼을 남녀의 결합으로 정의하는 것은 종교적 전통 위에 서 있고, 그 전통은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세계관 일부다. 가톨릭 사회 교리는 결혼을 보완적 성차를 가진 두 사람의 결합으로, 그리고 생명의 전달과 결합한 것으로 정의한다. 이것은 외부에서 강요된 규범이 아니라 오랜 신학적 성찰의 산물이다.
또한 사회보수주의는 결혼 제도가 갖는 구속력에 주목한다. 결혼이 개인의 자율적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재정의될 수 있는 유연한 제도가 된다면, 그 제도가 요구하는 헌신과 희생의 무게도 함께 희박해진다. 이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제도의 작동 논리에 대한 관찰이다. 제도는 그것이 수반하는 의무와 함께 유지된다. 의무의 근거가 사라지면 제도도 서서히 소진된다.
그러나 사회보수주의적 반대 논리 안에도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결혼의 신성한 의미를 지키고 싶다는 것과 국가가 법으로 동성 커플에게 법적 보호를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다른 주장이다. 전자는 신앙의 영역이고, 후자는 제도 설계의 영역이다. 이 두 가지를 혼동하면 논의가 뒤엉킨다.
이제 내 생각을 말할 차례다.
나는 동성혼에 반대한다. 이것은 신앙에 근거한 도덕적 판단이다. 결혼은 남녀의 보완적 결합이며, 그 구조가 사회적·신학적으로 고유한 의미를 갖는다고 나는 믿는다. 이 믿음은 단순히 전통이 오래됐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전통이 담고 있는 세대 간 연속성과 생명의 전달이라는 의미가 여전히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구축하려는 사상 체계가 요구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 이 사상은 도덕적 신념과 공적 제도 설계를 분리한다. 내가 어떤 것을 도덕적으로 잘못됐다고 판단한다고 해서, 국가가 그 판단을 모든 시민에게 법으로 강제해야 한다는 결론이 자동으로 따르지 않는다. 국가가 내 도덕관을 공유하지 않는 시민에게 그것을 강요한다면, 그것 역시 자의적 지배의 구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정리한다. 동성혼에 반대한다는 내 도덕적 입장은 유지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숙의민주주의적 절차를 통해 사회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충분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반대 의견이 억압되지 않으며, 소수의 목소리가 무시되지 않는 과정을 거쳐 내 입장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난다면, 나는 그 결정을 따른다. 이것이 법치와 절차에 대한 공화주의적 복종이다. 내 신념과 일치할 때만 제도를 따른다는 태도는 공화주의의 적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하겠다. 동성 커플의 법적 취약성 문제. 즉 병원 동의, 상속, 세제 등에서 발생하는 구체적 불이익은 동성혼의 인정 여부와 별개로 다뤄질 수 있다. 결혼 제도의 정의를 바꾸지 않더라도, 동반자 관계에 법적 보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그 취약성을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다. 이것은 페팃의 비지배 원칙이 요구하는 것. 즉 구체적 취약성의 제도적 해소에 응답하면서도 결혼 제도의 정의를 유지하는 방향이다. 이것이 지금 시점에서 내가 생각하는 가장 현실적인 설계 방향이다.
이 주제를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페팃의 시각은 동성 커플의 법적 취약성을 비지배 원칙의 위반으로 정확히 포착한다. 이 부분은 반박하기 어렵다. 버크의 시각은 결혼 제도의 역사적 무게와 급격한 재정의가 가져올 사회적 결과를 경고한다. 이 경고도 무시할 수 없다. 사회 보수주의는 결혼 제도가 갖는 도덕적·신학적 의미를 지키려 한다. 나는 이 입장에 가장 가깝다.
그러나 세 시각 중 어느 것도 혼자서는 충분하지 않다. 페팃만 따르면 신앙과 전통의 무게를 무시하게 된다. 버크만 따르면 동성 커플의 실질적 취약성을 방치하게 된다. 사회 보수주의만 따르면 도덕적 신념을 국가가 강제하는 방향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내가 도달한 결론은 이렇다. 동성혼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 반대는 국가가 동성 커플을 법적으로 무방비 상태로 방치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최종 결정은 충분한 숙의를 거쳐 사회가 내려야 한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절차를 존중하는 것. 그것이 이 사상이 이 주제에 대해 내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결론이다.